2017년의 영화들 – Best 7

한 해 동안 극장에는 수백 편의 영화가 개봉되어 관객들과 만날 기회를 가집니다. 하지만, 그 기회가 늘 똑같이 주어지지는 않습니다. 이야기와 소재에 따라 투입되는 예산과 배급 규모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저예산 독립 영화와 막대한 예산이 투입된 흥행 기대작이 똑같은 상영 기회를 가질 수는 없습니다. 개봉했는지조차 몰라서 챙겨보지 못하는 영화들이 생기는 이유입니다.

반면, 잘 알려진 영화지만 딱히 보고 싶지는 않아서 지나치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최근 들어 경제 사정이 그리 좋지 못한 우리나라 젊은 관객들은 영화 관람에도 가성비를 생각합니다. 영화를 선택할 때 실패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먼저 본 사람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참조하는 경향도 생겼습니다. 전문가의 평론보다는 일반 대중들의 평가가 이루어지는 인터넷 포털 평점과 댓글을 더 신뢰하고 선호하게 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지요.

이제 2017년도 며칠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올해 개봉된 영화 중에서 이것만큼은 놓치지 않고 봤으면 하는 영화 7편을 골라 보았습니다. 혹시라도 놓친 작품이 있다면 잠시 짬을 내어 챙겨보면서 올 한 해를 알차게 마무리하시기 바랍니다. 개별 작품 소개는 국내 개봉일 순서에 따라 정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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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로건> – 울버린의 고별사, 영생을 얻다
3/1일 개봉, 관객 수 216만 9천 명

시간이 갈수록 노쇠해지고 결국 죽음을 맞게 되는 것은 인간의 숙명입니다. <엑스맨> 시리즈의 대표 캐릭터 울버린은 특유의 초능력인 ’힐링 팩터’ 덕분에 그동안 이 법칙에서 벗어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영화에서는 그 역시 시간의 흐름 앞에서 어쩔 수 없는 벽을 느끼게 되지요.

우리가 이 한계를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세대와 세대를 이어주는 다리가 되는 것뿐입니다. 이 과정에서 생물학적 유전자는 물론, 삶의 방식과 정신적 가치까지 다음 세대로 전해집니다. 로건은 이 영화에서 자신을 둘러싼 폭력과 죽음의 역사가 자기 대에서 끝나기를 염원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세대가 더 나은 세상에서 살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엑스맨>(2000)부터 17년간 울버린 역할을 맡아 열연해온 휴 잭맨은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필생의 캐릭터와 작별하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국제적 명성과 기회를 가져다주었지만, CG 기술 대신 몸을 직접 쓰는 액션을 많이 해야 하는 슈퍼히어로인데다 근육질 몸매까지 그대로 유지해야 했기 때문에 배우로서는 부담이 많이 됐던 게 사실입니다. 그의 ‘퇴장’은 영화의 줄거리와 맞물리면서 감정의 깊이를 더합니다.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 장르의 쾌감 제대로 살린 수작
5/17 개봉. 관객 수 93만 8천 명

올해 한국 영화계의 가장 두드러진 흐름은 범죄를 다룬 영화들이 관객들의 주목을 받았다는 점입니다. 그간 이런 종류의 한국 영화들은 몇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설득력 없는 캐릭터, 앞뒤 안 맞는 전개, TV 드라마 같이 늘어지는 리듬감 때문에 좋은 평가를 하기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올해는 기본적인 완성도를 갖춘, 신예 감독들의 작품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불한당>은 단연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시나리오의 구성, 배우의 연기, 장면 연출, 촬영 및 사운드에 이르기까지 새로움을 추구하고 그것을 완성도 있게 보여주려 노력한 것이 피부로 느껴집니다. 올해 많은 예산을 들여 대작을 만든 기성 감독들이 일종의 타성에 빠진 듯 다소 심심한 작품을 만드는 데 그쳤다는 것을 떠올려보면 이 영화의 분전은 더욱 의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감독이 SNS에 쓴 말들이 구설에 오르면서 개봉 첫 주말부터 흥행에 어려움을 겪기는 했지만, 이후 열성 팬들이 생겨나고 뒤늦게 호평이 쏟아지는 등 노력을 인정받았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한국 영화계에 부족했던 활력을 불어넣은 영화로 기억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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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니 픽쳐스

<엘르> – 주도권을 틀어쥔 여성 주인공의 활약
6/15 개봉, 관객 수 3만 5천 명

올해 할리우드를 발칵 뒤집어 놓은 사건은 하비 와인스타인을 위시한 몇몇 영화계 인사들의 성 추문입니다. 그에게 성추행당한 사실을 털어놓은 배우와 스태프들의 증언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그가 자신을 거부한 배우들의 경력을 망치는 데 적극적이었다는 사실도 밝혀졌습니다. 이런 일련의 폭로는 영화계는 물론이고 사회 각 분야에 만연한 차별과 폭력을 다시금 일깨우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이자벨 위페르가 빼어난 연기를 보여 준 이 영화 <엘르>는 실제 세계와 사이버 세계, 두 가지 차원의 성폭력을 겪은 여성 주인공 미셸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잘 나가는 게임 회사 CEO이며 삶의 모든 부분을 주도적으로 해결하는 그녀는 자신이 겪은 폭력적 사건을 딛고 모든 사태의 주도권을 쥐게 되지요. 영화는 이 과정을 긴장감 넘치게 다룹니다.

미셸이 매사에 빈틈없이 대처하는 모습은 다소 비인간적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상황을 자기 마음에 들게 틀어쥐지 않으면 성에 차지 않는 그녀의 캐릭터는, 흔히 여성을 폭력의 피해자이거나 희생양으로 그리는 익숙한 방식과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하지만, 그녀가 남성이었다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별문제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미셸의 선택에 대해 거부감이 든다면 그것이 우리의 뿌리 깊은 편견 탓은 아닌지 되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덩케르크> – 전쟁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언제나 인간
7/20 개봉,  관객 수 278만 7천 명

솔직히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습니다. 사실상 패전이나 마찬가지인 ‘덩케르크 철수 작전’을 소재로 과연 어떻게 재미있는 전쟁 영화를 만들 수 있을지 의문이었거든요. 전투에서 패퇴하여 본국으로 퇴각하는 과정에서 어떤 스펙터클이 나올 수 있을지, 또한 이 사건의 당사국인 영국인이 아닌 이상 영화 속 상황에 몰입하는 것이 가능할지도 궁금한 사항이었습니다.

하지만, 크리스토퍼 놀런은 이런 우려를 깔끔하게 씻어내고 긴장감 넘치고 흥미진진한 영화를 만들어냈습니다. 전쟁이라는 상황에 부닥친 사람들의 실존적 고민을 생생하게 보여주면서, 전쟁 영화에 필수적인 것은 전투 시퀀스가 아니라 인간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합니다.

이를 위해 그는 <메멘토>, <인썸니아> 같은 초기작에서 천착했던 시간의 상대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합니다. 한 영화 안에서 해변의 일주일, 바다 위의 하루, 하늘에서 보낸 한 시간을 번갈아 보여 주면서 긴장감을 높이지요. 세심하게 디자인된 풍부한 사운드와 아이맥스 카메라로 찍은 넓은 화면 역시 관객의 몰입을 돕습니다. 극장에서 다시 볼 기회가 없다면 될 수 있으면 큰 화면에서 소리를 충분히 키워 놓고 보실 것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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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나래미디어(주)

<우리의 20세기> – 극대화된 영화의 표현력, 감성을 자극하다
9/27 개봉, 관객 수 3만 5천 명

이 영화는 세 여성의 삶에 주목합니다. 40세에 낳은 아들 제이미와 단둘이서 살아가는 50대 중반의 도로시아(아네트 베닝), 그녀의 집에 세 들어 사는 20대 예술가 지망생 애비(그레타 거윅), 제이미의 친구로서 자주 놀러 오는 10대 소녀 줄리(엘르 패닝)가 그들입니다. 제이미가 잘 클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도로시아의 요청은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이들을 하나의 공동운명체로 묶어줍니다.

작품의 시공간적 배경은 페미니즘 운동과 진보적 자유주의에 대해 믿음이 강했던 70년대 후반의 미국입니다. 그렇지만, 세 인물의 삶과 고민은 오늘날 여성들이 하는 고민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여서 감정 이입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삶은 본질에서 나아진 것이 별로 없기 때문은 아닐까요?

이 영화가 특별한 이유는 인물을 소개하고 보여주는 방식입니다. 일반적인 극영화처럼 탄탄한 플롯을 지닌 이야기를 통해 보여주지 않고, 인물을 담담히 지켜보고 다양한 일화를 차분하게 소개할 뿐입니다. 그렇지만 단 한 순간도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더 집중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관객의 감정은 천천히 끌어올려집니다. 향수 어린 음악과 화면 효과, 다양한 스틸컷, 내레이션 등을 활용하여 영화 매체의 표현력을 극대화하기 때문이죠.

<배드 지니어스> – 참신한 소재의 태국 스릴러
11/2 개봉, 관객 수 1만 7천 명

전교 1등 소녀 린은 자신이 다니는 사립학교에서 돈을 받고 자신의 답안을 공유하는 일종의 사업을 벌입니다. 하지만, 그녀에겐 별 죄책감이 없습니다. 자기는 아버지가 학교 선생님인 평범한 집안 출신이지만, 다른 친구들은 모두 넉넉한 부잣집 자제들이기 때문에 괜찮은 거래라고 생각한 겁니다. 대담한 그녀의 행보는 거액을 받고 미국 대학 입학시험의 답안을 공유하려는 계획을 세우는 데 이릅니다.

시험 성적에 목숨을 걸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커닝의 유혹을 받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배드 지니어스>는 이 보편적인 소재를 감각적인 스릴러로 풀어낸 독특한 영화입니다. 커닝도 일종의 범죄이므로 서스펜스와 스릴 넘치는 케이퍼 물로 만든 것이지요. 사람이 한 명도 죽어 나가지 않지만 짜릿한 스릴을 선사합니다.

또한, 학벌과 성적을 중요시하는 사회 분위기와 빈부 격차로 인한 갈등을 풍자하고, 젊은 세대의 잘못에 대한 나름의 해결책까지 제시하는 등 현실의 문제를 다루는 것도 잊지 않습니다. 이 영화가 아시아 각국에서 개봉하여 좋은 흥행 성적을 올린 데에는 고도 성장기를 거친 개발도상국들이 공통으로 겪고 있는 문제를 직접 건드린 것이 주효했습니다. 이제 막 아세안 시장 개척에 나서기 시작한 우리 영화 산업이 취해야 할 현지화 전략의 방향이 어떤 것인지 힌트를 얻을 수 있는 좋은 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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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 – 시리즈의 확장과 성숙이 남긴 감동
12/14 개봉, 관객 수 91만 9천 명(12/25 현재)

전 세계적인 흥행 선풍을 일으켰던 에피소드 7편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의 후속편으로 나온 이 작품은 스타워즈 팬덤 내부에서 꽤 격렬한 반감을 사고 있습니다. 주로 오리지널 3부작이 구축한 세계관과 포스의 원리를 무시했다는 식의 주장이 많지요. 하지만, 이런 평가는 일부 팬들이 40년 묵은 스타워즈 세계관에 너무 편협하게 집착한 탓입니다. 기존의 세계관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사춘기 청소년이 꾸는 꿈에 가깝거든요.

<라스트 제다이>는 어린 시절 이 세계에 매료되었으나 이제는 시리즈와 함께 성장한 성인의 입장에서 문제를 바라봅니다. 선대의 유산에 의존하지 않고 홀로 서는 법, 대책 없는 무모한 모험 대신 사려 깊은 계획과 헌신이 필요하다는 것, 개인적 분풀이가 아니라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의 행복과 안녕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한다는 사실 등을 짚어냅니다. 포스를 제다이의 종교적 해석 안에 가두지 않고 해방하는 것도 이런 변화의 연장선 위에 있습니다. 그 결과 이 영화는 올해 유난히 많이 나왔던 어떤 프랜차이즈(또는 세계관) 영화들보다도 인상적인 작품이 되었습니다.

예매율이 떨어지면서 국내 상영관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연말에 개봉한 어떤 영화보다도 완성도가 높고 가족과 함께 음미할 만한 메시지를 담은 영화인 것은 확실합니다. 적어도 연말까지는 극장 관람이 가능하니 얼마 남지 않은 기회를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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