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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8. 2. 개봉

80년 5월 광주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된 것은 대학에 들어간 첫 해 5월에 학생회관 앞에서 틀어 주던 기록 영상물을 통해서입니다. 그저 풍문으로만 들어 알고 있었던 끔찍한 일들을 직접 눈으로 보게 되니 마음이 너무 아파서 발걸음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사람에게 이런 짓들을 할 수 있나 싶었지요.

이 영화 <택시운전사>는 바로 그 영상물들 중 하나를 찍은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와, 그를 태우고 광주에 갔다가 무사히 김포공항까지 데려다 준 서울 택시기사 김사복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은 영화입니다.

80년 5월, 서울에서 개인택시를 몰고 있는 만섭(송강호)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택시기사입니다. 시위 때문에 길 막히면 짜증내고, 차를 무지 아끼고, 행여나 택시비 제대로 못 받을까 안달하는 소시민이지요. 남들이 보기엔 얌체 같고 자기 이익만 챙기려 드는 것 같지만, 초등학생 딸을 혼자서 키우며 사글세방에서 살아가는 처지라는 걸 감안하면 그런 모습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던 어느날, 기사 식당에서 우연히 외국인을 태우고 광주에 갔다 오면 10만원을 받기로 했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그 돈이면 몇 달 밀린 사글세를 한 번에 갚을 수 있는 상황이던 만섭은, 자기가 그 기사인 척하며 광주로 가는 외국인을 태우러 나갑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광주민주화운동을 전세계에 최초로 보도한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토마스 크레취만)와 만나게 됩니다.

영화는 광주 시내로 들어온 만섭이 여러가지를 경험하면서 겪게 되는 내적 성장과 변화에 초점을 맞춥니다. 캐릭터가 변화하는 단계에 맞춰 필요한 장면과 설정을 꼼꼼하게 교과서적으로 잘 배치한 각본이 관객으로 하여금 만섭의 감정에 쉽게 이입할 수 있게 합니다.

이런 종류의 각본은 겉보기엔 쓰기 쉬워 보여도 막상 쓰려고 들면 이만큼 설득력 있게 써 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한국 상업 영화들이 사건과 플롯 중심으로 돌아가면서 캐릭터의 성장에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할 때, 여름 흥행작으로서 보기 드문 성취를 이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소시민인 만섭이 변화하게 된 이유와 계기를 제대로 포착하고 있다는 점이 돋보입니다. 흔히 서민 계층일수록 보수적이라는 통념이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기 힘든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루의 벌이가 중요하고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책임감이 자꾸만 눈 앞의 세상에만 집중하게 만듭니다. 이들은 자기가 경험한 세상의 이치나 교훈 외에는 아무것도 믿지 않습니다.

극 중 만섭도 마찬가지입니다. 입만 열면 사우디 갔다 온 얘기를 꺼내고, 대학생들이 고생을 몰라서 저런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자기 경험을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사람이니까요. 이런 사람이, 자기가 직접 보고 겪은 만행들을 하나도 모른 채 뉴스에 나온 말만 믿고 있는 사람들을 봤을 때 얼마나 가슴 속에 열불이 나고 미안했을까요. 그건 국수를 마구 욱여넣거나 유행가를 흥얼거리는 것만으로는 절대로 끌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서울로 향하던 차를 돌려 다시 광주로 향합니다.

아무리 잘 만든 캐릭터라도 그것을 영화 속의 인물로 살아 숨쉬게 만드는 것은 배우의 몫입니다. 만섭 역할을 맡은 송강호의 연기는 정말 대단합니다. 언제나처럼 인물에게 자연스런 디테일과 개성을 부여하고 다른 인물들과 팽팽한 긴장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물론, 미묘한 심경의 변화를 표현하는 단독 샷들을 통해 관객의 마음을 잡아 끕니다. 이 영화의 가장 빛나는 순간들은 대부분 그가 스크린 속에 혼자 남겨졌을 때 만들어집니다.

5.18은 평범한 시민들이 주인공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유없이 가해지는 폭력에 분연히 맞서 싸웠고, 거리낌없이 타인과 연대하고 희생하며 우정을 나누었습니다. 광주 시민들은 특별한 일을 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 참혹한 상황을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일어섰던 것입니다. 80년 5월 광주의 시민들은 진정한 민주 시민의 정신이 무엇인지 보여 주었습니다.

일종의 ‘최후의 만찬’이라고 할 수 있는, 광주 택시기사 태술(유해진)의 집에서의 저녁 식사 시퀀스가 특히 기억에 남는 이유도 다르지 않습니다. 사실 영화적 만듦새로만 따지면 다소 투박하고 템포도 느리며 배우들의 연기도 아주 자연스럽지는 않은 장면입니다. 하지만 광주 사람이나, 서울 사람이나, 독일 사람이나 이 엄청난 폭력에 대해 똑같은 분노와 슬픔을 느낀다는 것을 잘 보여 줬습니다. 더욱이 결말부에서 극적으로 갈리는 이들의 운명을 알고나면 서글픔이 느껴지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택시운전사>는 사건 진행의 속도가 다소 느린 편이고, 상황과 감정을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장면들을 친절하게 죄다 보여 주는 등 영화적으로 매끄럽게 잘 만들어진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감동적입니다. 이 영화의 감동은 관객이 영화 속 인물들에 대해 가지는 정서적 친밀감에서 비롯됩니다. 평범한 소시민 만섭의 변화, 힌츠페터의 기자 정신, 광주 시민들의 연대와 희생은 관객들에게 어느 때보다도 더 생생하게 전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5.18이고 뭐고 제 앞길 하나 챙기느라 정신없이 살아온 기성 세대와 노년층의 마음까지도 어렵지 않게 사로잡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바로 이것이 영화 속 인물과 관객 간의 정서적 교감을 충분히 쌓지 못한 채, 연이어 벌어지는 사건들을 풀어 놓기에 바빴던 지난 주 개봉작 <군함도>와의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이 차이가 손익분기점 근처의 수익에 그치느냐, 아니면 또 다른 천만 영화로 등극하게 되느냐를 가를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