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노 다케시 회고전 (17. 6. 3. – 18.)

(c) 서울아트시네마

90년대의 일본 영화는 재기 넘치는 신예 감독들이 화제작들을 쏟아내었고, 구로사와 아키라나 이마무라 쇼헤이 같은 국제적인 거장들도 연출작을 선보이면서 재도약의 기회를 잡았습니다. <쉘 위 댄스>(1996)의 수오 마사유키, <러브 레터>(1995)의 이와이 슌지, <수자쿠>(1997)의 가와세 나오미, <링>(1998)의 나카다 히데오, <큐어>(1997)의 구로사와 기요시,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1993)의 최양일 등이 이 시기에 괄목할 만한 성과를 냈지요. 

그 중에서도 인기 코미디언 출신이면서 <그 남자 흉폭하다>(1989)로 데뷔한 기타노 다케시는 색다른 존재였습니다. 다른 감독들이 영화 공부를 했거나 영화 현장 조감독 출신이었던 것에 비해, 그는 오시마 나기사의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1983) 등 몇몇 작품에 출연한 것을 빼고는 영화 연출에 관해 문외한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요. 

그럼에도 그는 90년대 내내 중단없이 영화 작업을 했고, 시행 착오 속에서도 좋은 작품들을 연이어 내놓았습니다. 거짓과 배신이 횡행하는 현실 세계와 꿈과 행복이 있는 이상 세계를 대립항으로 설정하고, 그 사이에 낀 개인이 맞이하는 운명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이 그의 영화의 특징입니다. 이 과정에서 폭력과 유머는 각각 현실과 이상향의 분위기를 묘사하는 도구로 사용됩니다. 

자기 연출작의 각본과 편집을 늘 도맡아 하는 ‘작가’ 감독으로서, 연기 연출이나 이야기 전개에 있어서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구축해 오기도 했습니다. 특히 시공간을 자유롭게 통합하고 해체하는 수준까지 발전한 편집 스타일은 어느 누구도 따라하기 힘든 개성과 창의력이 듬뿍 담겨 있지요. 

그러나 2000년대 이후 지금까지 내놓은 영화들은 <자토이치>(2003)-<아웃레이지>(2010)-<아웃레이지 비욘드>(2012) 같은 흥행작도 있었고,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을 보여 준 영화들도 있었지만 90년대 만큼의 아우라를 보여 주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6월 3일부터 6월 18일까지 ‘웃음과 폭력: 기타노 다케시 회고전’이란 제목으로 기타노 다케시의 주요 연출작과 출연작을 묶어 모두 17편의 영화를 상영하고 있습니다. 이번 상영에는 2000년대에 나온 ‘자기 반영 3부작’처럼 그동안 국내에 제대로 소개되지 못했던 작품들까지 포함돼 있습니다. 

아래에는 기타노 다케시의 전성기를 수놓은 90년대 걸작 다섯 편을 골라서 간략히 소개해 보았습니다. 더 자세한 상영작 소개 및 상영 일정에 대해서는 서울아트시네마 홈페이지 (http://www.cinematheque.seoul.kr) 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하나]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1991)

시게루(마키 쿠로도)는 바닷가 동네에서 청소 일을 하며 살아가는 청년입니다. 어느 날 낡은 서핑 보드를 줍게 된 그는, 혼자서 서핑하는 방법을 터득하려 노력합니다. 처음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노력한 끝에 결국 다른 서퍼들도 인정할 만한 수준에 오르지요. 이런 과정에서 그와 늘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은 여자친구 다카코입니다. 

세간에 알려진 기타노 다케시의 이미지와는 다른, 담백한 전개가 돋보이는 영화입니다. 시게루와 다카코가 청각장애를 지녔다는 설정은 조용하게 관조하는 이 영화만의 톤을 규정하고, 두 사람이 세계와 맺는 관계를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 줍니다. 다 보고 나면 조용히 가슴이 먹먹해지는 영화로서, 기타노 다케시가 그저 야쿠자 영화만 만드는 예능인에 그치지 않을 것임을 명확히 보여 준 작품입니다. 
[둘] <소나티네>(1993)
야쿠자 중간 보스인 무라카와(기타노 다케시)는 조직의 이익을 위해 잔혹한 행위도 서슴지 않는 사내이지만, 은퇴할 생각도 품고 있습니다. 하지만 보스의 갑작스러운 명령으로 오키나와 조직의 분쟁을 중재하기 위해 떠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대부분의 부하들을 잃고 해변 마을에 은거하는 신세가 됩니다. 그곳에서 휴가 아닌 휴가를 보내게 된 무라카와 일행은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천진난만한 시간을 보냅니다.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 세계를 알 수 있는 단 한 작품을 꼽으라면 이 작품이 될 것 같습니다. 냉혹한 현실 논리와 인간적 교감을 원하는 마음, 그 대립 지점에서 여지없이 갈려 나가는 개인의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기타노 타케시 작품 세계의 원형을 온전히 구현하고 있으니까요. 그의 다른 작품들은 대부분 이 영화가 성취한 것들을 다양하게 변주하는 정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셋] <키즈 리턴>(1996)

마사루(카네코 켄)와 신지(안도 마사노부)는 고등학교 졸업반을 함께 보낸 친구입니다. 일종의 문제아인 마사루는 신지를 부하처럼 데리고 다니며 갖은 말썽을 피웁니다. 그러던 중 자기가 괴롭힌 애들이 데려온 권투 선수에게 두들겨 맞자 권투를 하겠다고 나서지요. 그러나 함께 권투를 시작한 신지에게도 밀리는 실력임을 깨닫자 바로 권투를 접고 야쿠자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기타노 다케시의 자전적 경험이 많이 배어 있는 청춘 영화입니다. 마사루와 신지의 이야기가 중심이지만 같은 또래 친구들의 모습 역시 비중 있게 다뤄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교를 졸업한 사회 초년생들은 각자의 삶을 개척하기 위해 분투하지만, 기성 세대들은 이들을 자꾸만 시험에 들게 하고 자신의 틀에 끼워 맞추려 합니다. 다들 그 과정에서 배신감을 맛보며 좌절도 하지만, 그것으로 인생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으니까요. 이것이 바로 이 영화가 건네는 가슴 벅찬 위로이자 격려입니다.  

[넷] <하나비>(1998)

형사 니시(기타노 다케시)는 친구 호리베(오스기 렌)가 자기 대신 혼자 잠복근무를 하다가 반신불수가 되는 일을 겪습니다. 불치병에 걸린 아내를 보러 갔다가 생긴 일이지요. 친구에 대한 미안함과 복수심으로 범인을 잔혹하게 살해한 니시는, 이 사건으로 인해 형사직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이후 빚 때문에 끊임없이 야쿠자들에게 위협받으면서도 아내와의 마지막 여행을 떠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합니다.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차지하며 기타노 다케시의 국제적 명성을 더욱 높인 작품입니다. 무엇보다 편집을 통해 시간과 공간을 재구성하는 편집 기술이 돋보이며, 끊임없이 죽음에 둘러싸여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는 주제 의식을 다채로운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 특별한 점입니다. 그러나 감상적인 낭만주의가 강하게 표출돼 있다는 점에서 2000년대 이후의 부진을 예고하는 작품이기도 하지요. 

[다섯] <기쿠지로의 여름>(1999)

9살 소년 마사오(세키구치 유스케)는 여름방학이 전혀 즐겁지 않습니다. 동네 친구들은 다 놀러가 버려 같이 놀 사람은 없고, 일 나가느라 바쁜 할머니와 같이 살면서 휴가를 간다는 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따로 살고 있는 엄마의 주소를 알게 된 마사오는 엄마를 찾겠다는 일념으로 혼자서 길을 떠나고, 그를 본 이웃집 아주머니는 전직 야쿠자 출신 남편 기쿠지로(기타노 다케시)를 보호자로 붙여 줍니다. 

<하나비>의 후반부에서 주인공 니시가 아내와 함께 떠난 여행 에피소드들이 다소 퇴행적으로 보였다면, 이 영화에서 마사오와 기쿠지로가 겪게 되는 배꼽 잡는 여정은 좀 더 경쾌하게 느껴집니다. 이것은 해맑은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냉혹한 현실로부터 아이의 순수를 보호해 주고 싶은 기쿠지로의 배려가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Advertisements

답글 남기기

아래 항목을 채우거나 오른쪽 아이콘 중 하나를 클릭하여 로그 인 하세요:

WordPress.com 로고

WordPress.com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Google+ photo

Google+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Twitter 사진

Twitter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Facebook 사진

Facebook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s에 연결하는 중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