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자 – 박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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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2009. 6.12.)

어린 시절 읽었던 위인전 속 김정호의 이야기는 누가 읽어도 억울하게 느낄 만큼 드라마틱하게 끝났습니다. 평생을 제대로 된 지도 만들기에 바친 한 사람의 일생이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산산이 부서져 버리는 결말이라니. 어린 마음에도 ‘이 세상의 삶이란 게 이런 거구나. 열심히 노력해도 이렇게 참혹하게 무시당할 수도 있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무척 슬펐습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가 사실은 육당 최남선이 상상력을 동원하여 쓴 내용이며, 일제가 학교 교과서 ‘조선어 독본’에 실으면서 정설처럼 여겨진 것일 뿐 실제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은 나중에야 알게 됐습니다. 하지만 김정호의 정확한 지도에 대한 염원이 남긴 강렬한 인상은 마음 속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았지요.

지난 추석 시즌에 공개된 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는 김정호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였습니다. 일종의 ‘지도 덕후’로서의 김정호의 면모를 유머러스하게 묘사한 것이 눈에 띌 뿐, 많은 부분이 상식 수준을 벗어나지 않았기에 딱히 새로울 것이 없었지요. 기억에 남는 것은 김정호가 걸어다니는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산천 풍경 뿐입니다.

하지만, 영화의 원작 소설인 박범신의 <고산자>는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사회상에 기반하여, 김정호의 알려지지 않은 삶과 사상을 매우 설득력 있게 재현하고 있거든요.

김정호의 행적에서 흔히 의문시 되곤 하는 것은 과연 그 시절에 사람이 직접 답사해서 지도를 그린다는 것이 가능했겠냐는 것입니다. 교통 수단도 변변치 않고, 길도 제대로 뚫려 있지 않은 곳도 많았을 테니까요. 그래서 김정호의 작업은 이른바 ‘필드’에서 이뤄진 게 아니라, 기존의 지도를 집대성하는 식으로 ’데스크’에서 이뤄진 것이었을 뿐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 책은 그런 의문을 합리적으로 해소할 수 있도록 소설적 상상력을 발휘합니다. 가난한 김정호가 전국을 다닐 수 있었던 것은 필요할 때마다 목수로서의 재주를 활용해서 일정 기간 일을 해 주고 밥을 벌어 먹었기 때문이라든지, 보부상이나 행상 등 각 지역을 잘 아는 사람들이 가지고 다니던 지도들을 입수하여 정확성을 높여 나갔을 수 있다는 것, 당시 한반도의 연안 항로를 오가는 화물선을 얻어 타면 생각보다 수월하게 전국을 다닐 수 있었다는 사실 등 매우 합리적인 대답을 내놓습니다. 그럼으로써 19세기 중반의 조선에서도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실증적으로 지도를 만드는 일이 가능했다는 것을 보여주려 노력합니다.

전체 4부로 나뉘어진 이야기는 각각 김정호가 지도 제작에 매달리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의 딸은 누구와 어떤 인연을 통해 얻은 것인지, 대동여지도에서 간도와 독도, 대마도가 빠진 연유는 무엇인지, 그가 왜 속세를 등지게 됐고 이후 아무도 그의 생사를 모르게 되었는지에 대해 작가 나름의 해답을 제시하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관심있게 보았던 것은 3부에서 김정호가 자기와 친하게 지내고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당대의 관료 및 실학자들과 국경의 문제를 논하는 대목입니다. 간도, 대마도, 독도 등을 우리 땅이라고 입으로는 이야기하면서도 실질적으로 그 땅을 관리하거나 자주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나서지 않았던 국가의 한계를 지적하는 김정호의 말은 오늘날의 위정자들에게도 유효한 질문입니다. 국경 문제로 민족 감정을 건드려 지지율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하면서도 실질적인 조치는 민간 조직에게 떠 넘겨온 정치인들의 비겁한 행태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었던 기회였습니다.

전체적으로 읽기 쉬운 문장들로 빠르게 달려가는 작가 특유의 문체 덕분에 책장은 아주 잘 넘어가는 편입니다. 다만, 전체 구성이 느슨한 편이어서 잘 짜인 이야기로서의 재미를 느낄 수는 없습니다. 고산자와 비구승의 기구한 인연을 풀어가는 대목들도 좀 식상하게 느껴지는 편이고요.

그래도 실학을 이야기하면서도 기존의 신분제 질서와 새롭게 싹트는 자본의 힘 앞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당시의 지식인들과, 세도정치가 극에 달해 실력보다는 외척 세력과 가까운 정도가 출세의 비결이었던 관료들의 틈바구니에서, 김정호 같이 강한 집념을 가진 선구자가 느꼈을 울분과 절망, 그리고 시대적 소명 의식 등이 잘 표현돼 있기 때문에 관심이 있다면 읽어 볼 만한 가치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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