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2. 25. 개봉
일반적인 극영화에서 홀로코스트는 말 그대로 ‘소비’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장 서사에서 주인공이 극복하거나 피해야 할 ‘끔찍한 일’이 되거나, 전쟁물이나 액션물에서 나치 독일을 징벌하기 위한 ‘합당한 이유’로 등장하는 식이지요. 이렇게 대중의 오락을 위해 순화되는 과정을 거치다 보면, 추악한 역사적 범죄가 갖는 무게는 한없이 가벼워지고 말 것입니다.
이 영화 <사울의 아들>은 그런 경향에 맞서, 홀로코스트의 처참한 실상을 영화적으로 표현하고 전달하는데 전력을 다합니다.
우선, 충실한 역사적 고증 노력이 돋보입니다. 감독 라즐로 네메스는 역사 연구 자료와 생존자 증언 등을 바탕으로 이 영화를 기획했고, 촬영장을 세팅할 때도 역사학자의 도움을 받아 전구 하나까지 꼼꼼히 재현했다고 합니다. 이 영화의 시공간적 배경이 ‘존더코만도들의 반란’이 있었던 이틀 동안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인 것 역시 실제 고증에 따른 것이지요.
표현 방식에 있어서도 감독은 현명한 선택을 합니다. 적어도 이 지옥도를 일종의 가상 현실 체험으로 만들어 버리지는 않으니까요. (만약 그랬다면 19금 잔혹 공포물이 되어버렸을 지도 모릅니다.) 이 영화의 촬영 전략은 전체적인 공간 세팅과 동선을 미리 짜 놓은 다음, 주인공 사울의 움직임을 따라다니는 카메라가 마치 손전등처럼 어둠의 일부를 드러내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사운드가 추가되면 우리는 화면으로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게 됩니다. 사울 주변에서 나는 거의 모든 소리들이 공들여 디자인되어 있는데, 다양한 지역에서 끌려온 포로들이 썼을 법한 각종 언어들이 모두 들어가 있을 정도입니다.
이 영화에서 소리의 힘은 무척 센데, 관객의 상상력을 증폭시켜 나치의 유대인 말살 정책의 끔찍함과 역겨움을 날것 그대로 느끼게 만듭니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기존 홀로코스트 영화들의 수용소 묘사는 정말 순화되었다는 걸 뼈저리게 느낄 수 있습니다. 이제 홀로코스트를 뻔한 방식으로 다룬 영화들은 더이상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
아들의 시체를 잘 묻겠다며 헤매고 다니는 아버지의 모습을 전면에 내세운 이야기 구성 역시 좋은 선택이었습니다. 기존 극영화에 익숙한 관객들의 관습적 기대 – 어찌 됐든 주인공은 고난 끝에 자기 목표를 달성할 것이라는 – 를 이용하여 극에 대한 집중도를 높일 수 있었으니까요. 또한 죽은 아이가 사울의 진짜 아이인지 모호하게 처리함으로써, 사울을 이 야심차고 진정성 가득한 영화적 추모 의식의 제관으로 삼는데 성공합니다.
이 영화에서 사울과 다른 존더코만도들이 상징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태도일 것입니다. 과거의 비극을 제대로 기억하고 추모하는 태도, 그리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냐며 미래를 강조하는 태도.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둘 중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지는 너무나도 명백해집니다.
우리나라의 근현대사 역시 수많은 아픔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멀게는 일제의 만행부터, 가깝게는 세월호의 비극까지. 그러나 우리 사회는 한번도 역사적 비극에 대해 제대로 기억하고 반성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부끄러워하거나 왜곡하고, 심지어 죄상을 감추려고 하기까지 했습니다. 앞으로 더 잘 살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요. 어쩌면 오늘날 한국 사회의 처참한 몰락은 백 년 넘게 지속된, 역사적 비극에 대한 이런 잘못된 태도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