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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GV아트하우스

2019. 1. 10. 개봉

미국 사회의 뿌리 깊은 흑백 차별을 다룬 영화는 80년대와 90년대에 나온 스파이크 리나 존 싱글턴 같은 흑인 감독들의 작품들이 주목받은 이래 꾸준히 만들어져 왔습니다. 당시 예리한 비판 의식과 직설적인 화법으로 무장한 이들의 작품은 큰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며 흥행에도 성공했죠.

그로부터 30여 년이 넘게 지난 지금 할리우드 영화계는 훨씬 더 다양한 장르에 걸쳐 흑백 차별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노예 12년>이나 <히든 피겨스>처럼 역사적 인물에게 초점을 맞추거나, <겟 아웃>처럼 장르 규칙을 활용하고, <블랙 팬서> 같은 블록버스터 영화를 통해 흑인의 자부심을 일깨우는 단계에 이르렀죠. 이렇게 된 것은 미국 사회의 인구 구조가 바뀌었고 시민 의식이 향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보니 <그린 북>의 줄거리는 사실 딱히 새롭게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흑백 차별이 극심하던 60년대 초반, 미국 남부 지역 순회공연에 나선 흑인 클래식 피아니스트와 그를 태우고 다니는 백인 운전사의 이야기일 뿐이니까요. 당연히 두 사람의 우정은 꽃필 것이고, 흑인 피아니스트가 겪는 고초를 보고 백인 운전사는 각성하게 될 것입니다.

다 알 것만 같은 설정을 넘어선 특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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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GV아트하우스

그러나 이 영화는 시작한 지 채 10분도 되지 않아 자신만의 특별함을 뽐내면서 관객을 사로잡습니다. 다음 장면이 어떻게 될지 궁금해서라도 계속 스크린을 지켜보게 되지요. 뻔해 보였던 이야기가 이렇듯 매혹적으로 탈바꿈한 이유는 매력적인 두 중심 인물 때문입니다. 그들의 성격을 바탕으로 섬세하게 구축된 이야기는 다른 어떤 영화와도 다른 개성을 갖추게 됐습니다.

백인 운전사 토니 발레롱가(비고 모텐슨)는 지식이나 교양은 부족하지만 일을 되게 만드는 수완가이자 무지막지한 식욕의 소유자입니다. 흑인 피아니스트 돈 셜리(마허샬라 알리)는 품위 있는 언어와 몸가짐이 생활화된 교양인이자 예민하고 강단 있는 예술가죠. 둘의 성격에 딱 들어맞는 디테일이 더해지고, 소소한 사건들이 쌓이면서 두 사람의 감정은 손에 잡힐 듯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관객은 이들의 속내를 알게 될수록 친밀감을 느끼고 극에 집중하게 됩니다.

여기에는 비고 모텐슨과 마허샬라 알리의 뛰어난 연기가 큰 몫을 했습니다. <반지의 제왕>의 아라곤 역할로 이름을 알린 비고 모텐슨은 원래 날씬하고 탄탄한 체격의 소유자죠.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몰라볼 정도로 살을 찌워서 토니의 남다른 풍채와 식욕을 잘 표현했습니다. <문라이트>로 재작년에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받은 마허샬라 알리는 날씬한 몸의 라인을 강조하는 신체 표현을 통해 돈 셜리의 여리면서도 강인한 면모를 잘 보여주었습니다.

곳곳에 포진한 자연스러운 유머 포인트도 영화 관람의 재미를 더하는 요소입니다. 여기엔 감독 피터 패럴리의 연출이 큰 역할을 합니다. 그는 동생 바비 패럴리와 함께 작업한 <덤 앤 더머>(1994)와 <메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1998)로 90년대 미국 코미디 영화 시장을 제패한 인물입니다. 과도한 설정으로 ‘화장실 코미디’라는 얘기도 많이 들었지만, 언제나 사회적으로 비주류에 속하는 인물들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있었죠. <그린 북>에서는 특유의 기상천외한 설정 없이도 어렵지 않게 훈훈한 유머와 감동을 자아내는 연출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백인의 관점이라는 한계를 극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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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 북>이 흑백 인종차별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은 백인인 토니입니다. 영화 전체 이야기가 토니의 입장에서 서술되죠. 감독 역시 경력 내내 백인들의 이야기만 해온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차별의 피해자인 흑인의 입장을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연말연시 시상식 시즌의 또 다른 화제작으로서 이미 작년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흑인 감독 스파이크 리의 <블랙클랜스맨> 같은 작품처럼 신랄한 맛은 더더욱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장점은 솔직함입니다. 백인으로서 흑백 차별에 관해 잘 모르는 부분까지 굳이 아는 척하지 않습니다. 그러는 대신, 토니와 돈 셜리 사이에는 인종 문제뿐 아니라 사회 경제적 지위, 지적 수준, 성적 취향, 가족과의 관계 등 다양한 층위에서 생기는 격차가 있다는 것을 짚어냅니다. 그러면서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발생하는 차별에 관해 생각해 볼 기회를 줍니다.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특출한 누군가의 노력으로 단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 다수가 변화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사람의 일생을 다 바쳐도 완전히 해결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목표에 대한 선명성을 유지하는 것 외에도, 그것을 보편적인 인간의 문제로 바꾸어 쉽게 설명하고 공감대를 넓히는 작업도 필요합니다.

<그린 북>은 정확히 후자의 작업을 할 수 있는 영화로서, 인종 차별을 포함한 모든 차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합니다. 누구나 차별의 희생자가 될 수 있고, 그것이 명백히 잘못이라는 것을 보여주죠. 따라서 접근이 어렵지 않습니다. 어쩌면 태극기 집회에 나가는 노인이나 일베에 빠진 젊은이가 이 영화를 재밌게 보고 나서 자신의 편협한 생각을 고쳐먹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흑인 배관공이 입 대고 마신 유리컵을 바로 쓰레기통에 처넣던 인종차별주의자 토니도 셜리와 깊이 교감하게 됐으니까요. 훌륭한 이야기는 직접 경험 못지않게 강렬한 체험을 선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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