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차버린 스파이 The Spy Who Dumped me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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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픽쳐스

*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주의하세요!

최근 할리우드의 경향 중 하나는 그간 백인 남성이 독점하던 역할을 타 인종과 여성에게 맡기면서 변화하는 관객의 취향에 맞추려 노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올해 개봉한 <블랙 팬서> 같이 흑인 중심의 슈퍼히어로 영화가 크게 히트하고, 오랫동안 남성 중심이었던 하이스트 영화에 도전장을 낸 <오션스8>이 흥행에 성공한 것이 좋은 예입니다.

<나를 차버린 스파이> 역시 그런 최신 흐름을 따라간 영화입니다. 일반적인 스파이 액션 영화에서라면 단역에 불과했을 스파이의 여자 친구와 그녀의 절친이 이야기의 중심에 선 코미디 영화이니까요. 30살 생일을 맞은 오드리(밀라 쿠니스)는 절친 모건(케이트 맥키넌)이 준비한 떠들썩한 파티에도 흥이 나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 남자친구로부터 문자로 결별 통보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드리의 남친 드류(저스틴 서룩스)는 그 시각에 리투아니아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있습니다. 그는 바로 CIA 요원이기 때문이죠.

두 여성의 흥미로운 좌충우돌,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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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픽쳐스

이 영화의 재미는 스파이나 액션과는 전혀 무관한 삶을 살던 오드리와 모건이 드류 때문에 유럽 대륙을 무대로 한 첩보전에 휘말린다는 설정에서 나옵니다. 두 ‘아마추어’가 갖가지 소동과 임기응변으로 위기 상황을 얼렁뚱땅 돌파하는 과정은 일종의 통쾌함을 선사합니다.

여기에는 준수하게 설계된 액션 장면이 큰 몫을 합니다. 아주 독특하고 새로운 것은 없어도, 이미 알려진 방법을 적절하게 재활용한 점이 돋보입니다. ‘일반인 여성 두 명을 둘러싸고 나올 수 있는 액션’이라는 제한된 설정 안에서 최대치를 뽑아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액션 장면이 비교적 중심을 잘 잡고 있기 때문에 코미디도 효과를 발휘할 여지가 생깁니다.

<배드 맘스>와 <배드 맘스 크리스마스>의 연이은 히트로 여성 캐릭터가 이끄는 영화도 충분히 웃기고 흥행할 수 있음을 증명한 밀라 쿠니스는 이번에는 SNL에서 맹활약 중인 코미디언 케이트 맥키넌과 호흡을 맞췄습니다. 케이트 맥키넌이 오버 액션 가득한 코미디를 주도하고 밀라 쿠니스가 판을 깔아주는 식의 호흡이 잘 맞는 편입니다.

아쉬운 점은 이런 좋은 흐름이 영화 중반 이후에는 사라진다는 겁니다. 이들이 휘말리게 된 사건의 실체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고, 이들을 돕는 다른 남성 요원까지 끼게 되면서 극의 속도가 뚝 떨어집니다. 차라리 개연성은 떨어질지 몰라도, 초중반의 좋았던 흐름을 이어받아 끝까지 두 여성이 재치와 능력을 발휘하는 쪽으로 풀었다면 훨씬 더 나았을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스파이 세계를 헤쳐나가는 여성 주인공을 내세운 코미디로서 이 영화와 비슷한 계열에 있는, 멜리사 매카시 주연의 흥행작 <스파이>(2015)와 비교되는 부분입니다. <스파이>는 책상물림 CIA 직원으로 남자 요원을 보조하던 멜리사 매카시가 직접 현장에 나가게 되면서 벌이는 소동과 활약을 다뤄 큰 호응을 받았죠. 일반 관객들이 쉽게 감정 이입해서 대리 만족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이 흥행의 핵심 요인이었습니다.

여성 중심 영화, 더 만들어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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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픽쳐스

할리우드 영화계에서 여성의 몫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아무리 스타급 여배우라도 조금만 나이가 먹으면 조, 단역급으로 누군가의 아내나 엄마로 나오기 일쑤입니다. 남자 배우들이 50대가 되어서도 멜로 영화의 남자 주인공으로 나와 매력을 과시하는 것과는 다르게요. 여성 제작자나 각본가는 꽤 있지만, 남성에 비하면 적은 숫자입니다. 특히 한 해에 메이저 제작사의 장편 영화를 연출하는 여성 감독의 수는 극히 적습니다.

그래서 여성들은 원하지 않아도 남성의 시선과 취향으로 기획된 영화를 아무래도 많이 보게 됩니다. 이런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꾸기 위해 이제껏 많은 여성 영화인들이 노력해 왔습니다. <나를 차버린 스파이> 역시 그런 노력의 하나입니다. 여성 감독 수잔나 포겔이 각본과 연출을 맡았으며, 최근 여성 캐릭터가 중심이 된 영화에 자주 출연한 밀라 쿠니스나 케이트 맥키넌이 극을 이끕니다.

물론, 이 영화의 완성도를 나쁘게 평가할 수는 있습니다. 스파이물로서는 기존의 상투적인 설정을 많이 쓴 편이고, 극적 재미를 높일 수 있는 위기감도 덜합니다. 완벽하게 여성 중심적이지도 않고 자립적인 여성상을 보여준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간 몸 좋은 남자들이 나오는 지루한 액션 영화들도 참 많았다는 걸 고려하면, 그렇게 무시당할 만한 완성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성 중심의 장르 영화는 이제 걸음마 단계입니다. 몇몇 잘 만든 작품도 있지만, 만듦새가 아쉬운 영화가 더 많습니다. 남성 중심으로 만들어진 장르 규칙이나 이야기 구성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성별만 바꾸는 정도에 그치기도 하죠. 그러나 비관적일 이유는 없습니다. 여성의 문제와 관심사를 효과적으로 표현할 방법을 찾기까지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겪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요. 지금은 <나를 차버린 스파이> 같은 프로젝트들이 좀 더 많이 나와줘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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