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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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GV아트하우스

2018. 5. 17. 개봉

이창동 감독은 세계 유수의 국제 영화제에서 주목하는 몇 안 되는 한국 감독 중 한 명입니다. 노무현 정부에서 문화관광부 장관을 하기도 했던 그는, 이명박-박근혜 정권 아래에서 정치적인 이유로 불이익을 받기도 하면서 최근 들어 작품 활동에 차질을 빚기도 했습니다. <버닝>은 그가 2010년 작 <시> 이후 8년 만에 선보인 신작입니다.

종수(유아인)는 언젠가는 소설을 쓰고 싶어 하는 문예창작과 졸업생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물류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죠. 어느 날 우연히 나레이터 모델로 일하는, 같은 동네에 살았던 친구 해미(전종서)를 만납니다. 아프리카에 여행을 간다는 해미는 종수에게 그동안 자기 집에 들러서 고양이에게 밥을 달라고 부탁합니다. 고양이 밥을 주며 막연히 해미를 기다리던 종수는 귀국 날 공항에 나가고, 해미가 아프리카에서 처음 만나 친구가 되었다는 남자 벤(스티븐 연)을 만납니다.

<버닝>이 포착한 청춘의 단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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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GV아트하우스

종수와 해미, 벤은 각기 자존감을 잃은 젊은이의 전형을 잘 보여주는 인물들입니다. 사회 경제적 지위가 낮은 종수와 해미는 권위적인 부모나 사회에 짓눌려 자존감을 잃었거나, 자기 삶에 낭만적인 포장을 덧씌워 부족한 자존감을 채우려 애써 왔습니다. 벤 역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지만, 딱히 자존감이 높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늘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곁에 두고 적당히 깔아뭉개 놔야 하거든요. 모두 한국 사회에서 누구나 한 번쯤은 만나봤을 법한, 매우 현실적인 인물들입니다.

그러나 이 영화의 문제는 그 이상이 없다는 겁니다. 위에 제시된 인물 설정에서 거의 제자리걸음을 하는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2시간 30분 동안 관객이 보게 되는 것은 인물에 대한 끊임 없는 부연 설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거기엔 새로운 통찰도 없고 기발한 재치도 없습니다. 눈에 띄는 화면 구성이나 문학적인 메타포가 있긴 하지만, 그 역시 영화나 소설에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는 관객이라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정도라서 발견의 기쁨도 덜합니다.

감독은 어느 인터뷰에서 이 영화에 다양한 미스터리가 존재한다고 했지만, 진실을 꼭 알아내고 싶을 정도로 궁금증을 자극하는 수준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고 저렇게 해석할 수도 있는 모호함에 가깝죠. 보는 사람에 따라 어느 쪽으로든 상상력을 발휘할 수는 있겠으나, 관객이 시간을 들여 이런 ‘의도된 모호함’을 곱씹을 가치가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오히려 <버닝>은 기존의 이창동 감독 영화에서 부족했던 점들을 더 도드라져 보이게 합니다. 지금껏 그가 그려낸 여성 인물들은 성적으로 대상화되거나, 아니면 현실 감각이 다소 떨어진다는 식의 묘사 안에 갇혀 있었습니다. 전자의 경우가 <초록물고기>의 미애, 첫사랑-조강지처-불륜 상대로 규정되는 <박하사탕>의 여성들, 날건달에게 강간당하는 것으로 사랑을 시작하는 <오아시스>의 공주입니다. <밀양>의 신애나 <시>의 미자는 후자의 경우로, 현실 감각이 다소 부족하고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인물들이죠. <버닝>의 해미는 이런 두 가지 속성을 모두 갖춘 인물로서, 감독의 여성관이 데뷔 20년이 넘도록 여전히 정체돼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또 하나는 감독이 생각하는 주제에 끼워 맞추느라 인물 설정과 이야기 전개가 작위적으로 보일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창동 감독의 인물들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해서 위험을 자초하거나, 영화의 흐름으로 봤을 때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개연성이 충분해 보이는 데도 감독이 짜놓은 대로 행동할 때가 많습니다.

<버닝>에서도 종수, 벤, 해미의 관계는 느닷없는 연락과 예상치 못한 말을 내뱉는 식의 우연적인 행동을 통해 형성될 뿐입니다. 게다가 종수는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감독이 의도한 결말에 맞게 고립을 자처하며 자폐적인 상태에 머무릅니다. 앞뒤가 맞아떨어지지 않을 때가 많은 이 영화의 전개를 두고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모호한 경계’라는 식의 표현을 쓰는 평론도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굳이 그런 해석까지 덧붙여서 감독의 의도를 최대한 좋게 이해해줄 이유가 있는지 의문입니다.

절망 속에 희망 보여준 감독, 이번 신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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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GV아트하우스

젊음은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운이 넘치는 때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미숙하고 불안한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 시기에 자존감이 한없이 높았다가도 곧바로 바닥을 치곤 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특히 한국처럼 가부장적 가족주의가 여전히 위력을 떨치고 있고, 장기간의 군부 독재에 이어 선거로 뽑힌 이명박-박근혜 정권까지 공공연하게 국민을 억압해온 나라에서라면 더할 것입니다. 여기에 가중되는 취업난은 청년층의 자존감을 벼랑으로 몰아붙이는 형국입니다.

하지만, 그런 상태가 영원히 지속하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나 시간이 지나면 사회생활과 다양한 인간관계를 겪으며 조금씩 성장하고 무뎌지니까요. 나 혼자만 최악인 것 같지만,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면 모두가 어렵고 저마다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기 위해 노력 중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비참한 감정과 고립된 처지는 기댈 만한 누군가를 만나고 연대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는 어느덧 윗세대와 아랫세대를 잇는 위치에 오르게 됩니다.

사실 <버닝> 이전 이창동 감독 영화가 들려 줬던 이야기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앞에서 지적한 것과 같은 약점은 있어도, 최악의 순간에서 빛을 발하는 인간성과 연대 의식이 온기를 전하곤 했으니까요. 그의 영화 속 주인공들은 시련 속에 고통받으면서도 타인과 관계 맺음을 통해 작게나마 숨통을 틔울 기회를 잡아나갔습니다. 때로는 <박하사탕>에서처럼 시공을 초월하기도 하고, <시>에서처럼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기도 하면서요.

그러나, <버닝>에서는 그런 것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이 영화의 후반부에 나오는 종수의 모습은 해미에 대한 연대 행위라고 하기엔 너무나 보잘것없는 수준입니다. 그저 자꾸 자기 안으로 틀어박힌 끝에 저지른 자기 만족적인 행위에 가까워 보이죠. 여기서는 어떠한 연대 의식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창동 감독이 8년 만에 내놓은 신작에서 가장 실망스러웠던 점입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남겨진 희망 한 조각을 보여 주곤 했던 감독의 장점은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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