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토냐 I, Tonya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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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 진진

2018. 3. 8. 개봉

토냐 하딩은 90년대 초반에 전성기를 보낸 미국의 정상급 피겨 스케이팅 선수입니다. 미국 여자 선수 최초로 트리플 악셀을 성공하기도 했죠. 김연아 선수의 우상인 미셸 콴이 미국 챔피언이 되기 직전에 그 자리에 있던 선수입니다. 하지만, 그녀를 국제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것은 스케이트가 아니라, 당시 라이벌 선수였던 낸시 케리건 피습 사건이었습니다.

낸시 케리건은 94년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 선발전을 겸한 전미 선수권 도중 괴한에게 피습을 당합니다. 프리 스케이팅을 하루 앞두고 벌어진 사건이라 중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죠. 결국 전미 선수권 1, 2위는 토냐 하딩과 당시 13세였던 미셸 콴이 차지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이후에 벌어집니다. 이 사건을 수사한 결과 토냐 하딩의 전 남편과 경호원을 자처하던 남자가 연루된 사실이 밝혀진 거죠. 토냐 하딩 역시 이 음모에 연관됐다는 사실을 법정에서 인정하면서 피겨계에서 완전히 퇴출당하게 됩니다.

<아이, 토냐>는 바로 이 토냐 하딩에 관한 영화입니다. 토냐(마고 로비)는 4세 때 스케이트 수업을 받기 시작했을 정도로 재능이 대단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어머니 라보나(앨리슨 제니)는 강압적인 폭군이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폭력을 행사하며 스케이트 연습만을 강요했습니다. 선수 생활을 하는 중에도 어머니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토냐는 10대 시절 만난 남자 친구 제프 길룰리(세바스찬 스탠)를 탈출구로 삼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제프 역시 그녀의 어머니와 별다를 바 없는 인간이었다는 것이 밝혀집니다.

‘악녀’의 불행한 가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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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 진진

토냐 하딩은 낸시 케리건 사건 이후 ‘악녀’의 대명사로 불리게 됩니다. 당시 전 세계 언론은 그녀가 범행에 연루된 사실을 연일 대서특필하며 가십거리로 삼았습니다. 심지어 오바마 전 대통령도 자신의 선거 유세에서 그녀의 악행을 언급할 정도였죠. 하지만, 이 영화는 세간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토냐 하딩의 모습에 주목합니다.

그녀는 남다른 스케이팅 실력으로 주목받았으나 집안 사정이 어려워 다른 선수들처럼 풍족한 환경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의 폭력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자랐고 스케이트 외에 다른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탓에, 또다시 폭력적인 남편을 만나는 악순환에 빠집니다. 뛰어난 운동 능력을 지녔지만 우아함은 부족했던 그녀는 사실 미국 사회가 원하는 피겨 스케이팅 스타 이미지에 맞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실력에 맞는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기도 했죠.

감독 크레이그 길레스피와 촬영을 맡은 니콜라스 카라카차니스는 블랙 코미디와 가짜 다큐멘터리를 넘나들면서 토냐 하딩의 삶을 재구축합니다. 유려한 카메라 움직임이 돋보이는 화면을 보여 주면서, 그 밖에서 내레이션을 들려주던 인물을 자연스럽게 화면 안에 등장시켜 대사를 그대로 이어받게 합니다. 때로는 화면 속 인물 중 하나가 느닷없이 관객과 눈을 맞추며 말을 걸게 만들기도 하죠. 이런 형식은 관객과 스크린 사이의 벽을 허물면서, 토냐 하딩의 삶을 더욱 가깝게 느낄 기회를 제공합니다. 영화 속에서 그녀가 겪은 심각한 폭력은 어느 영화에서보다 위협적으로 다가오며, 피겨 스케이팅 대회에서 느낀 피해의식과 깊은 좌절감 역시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마고 로비는 스케이트가 유일한 탈출구였던, 불행한 젊은 여성을 재현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습니다. 스케이트 타는 연기는 물론, 배역 특성상 때리고 맞는 상황이 많았음에도 아낌없이 몸을 던지거든요. 특히,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 출전 직전 멘탈이 완전히 붕괴된 채로 대기실에 홀로 앉아 거울을 보는 장면은 이 영화 전체를 요약해서 보여주는 명장면입니다.

이 영화로 올해 아카데미 조연상을 받은, 어머니 라보나 역할의 앨리슨 제니 역시 좋은 연기를 보여줍니다. 토냐에게 평생 가도 잊히지 않을 트라우마를 안겼고, 성인이 되는 과정에서도 부정적인 영향만 끼쳤던 사람으로서 묵직한 존재감을 과시합니다. 남편 제프 역을 맡은 세바스찬 스탠 역시 토냐의 몰락을 재촉한 최악의 남자라는 역할에 충실하며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최악의 상황에서 다시 일어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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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 진진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토냐 하딩을 둘러싼 이 소동극에 연관되었을 금전 문제를 다루지 않은 것입니다. 영화에는 토냐 하딩이 시종일관 어렵게 피겨 선수 활동을 이어간 것처럼 나오지만, 성적을 내기 시작하면서 후원하는 기업이 꽤 있었다고 합니다. 릴레함메르 동계 올림픽 준비를 다시 시작할 수 있었던 것도 금전적 뒷받침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더구나 올림픽 출전 여부에 걸린 경제적 이득이 없었다면, 전 남편 제프가 그렇게 ‘무모한 계획’까지 꾸밀 이유도 없었겠죠.

영화의 전반적인 흐름이 토냐 하딩의 입장에 다소 치우쳐 있다는 것도 걸리는 부분입니다. 그녀가 아무리 어렵게 자랐다고 하더라도, 이미 법정에서 스스로 유죄를 인정하고 집행 유예 판결을 받은 범죄자라는 사실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낸시 케리건 피습 사건 자체는 큰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허벅지 근처를 한 대 때리고 도망가는 정도였지, 신체적으로 경기력에 영향을 미치는 수준은 아니었습니다(낸시 케리건은 피습 얼마 후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에 참가하여 은메달을 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라이벌 선수에게 위해를 가할 계획에 가담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비난받을 만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영화는 보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살기 위해 오뚝이처럼 일어난 토냐 하딩의 의지가 오롯이 빛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늘 원하는 것을 제대로 누리지 못했습니다. 노력에 비하면 평가가 낮았던 피겨 선수 생활, 사랑받고 싶었지만 누구에게도 제대로 된 사랑을 못 받았던 일상생활, 모두의 조롱 속에 최악의 상태에서 치른 올림픽 경기, 삶의 전부였던 피겨 스케이팅에서 퇴출된 이후의 상황이 모두 그랬습니다. 그렇지만 토냐는 언제나 툭툭 털고 일어나 자기만의 삶을 살았습니다.

한평생을 살면서 자신이 꿈꾸던 바를 그대로 이룰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세상은 좀처럼 우리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달콤한 성공을 맛보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밑바닥으로 곤두박질칠 수 있는 것이 인생입니다. 이런 꼴을 당하고서는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삶은 여전히 계속되고, 우리에겐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권투 시합에 나섰다가 형편없이 뭉개져 링 바닥에 뻗은 토냐 하딩이 형형한 눈빛으로 다시 일어서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런 용기가 어떤 것인지 잘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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