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에 대해 생각하다: 4편의 영화

어느 사회나 그렇겠지만,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돈이 많으면 대단히 생활이 편해집니다. 특히 소득과 재산이 상위 1% 안에 드는 부자들은 하고 싶은 일은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가 있다면, 소득 수준에 따라 차등으로 적용되는 일부 복지 혜택을 못 받는 정도가 아닐까 싶네요. 그중에서도 한국의 재벌가는 일반인의 감각을 뛰어넘는 수준의 부를 축적한 사람들입니다. 사실상 국내에서만큼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얼마 전 1심 판결이 난 ‘박근혜 국정 농단’ 재판에서도 그랬습니다. 총 18개 혐의 중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이 관련된 2개 혐의만 무죄로 판결 났습니다. 그뿐인가요? 비자금 조성이나 부하직원 폭행 등의 행위를 저질러도 잠깐 감옥에 갔다 오면 됩니다. 이후 죄다 경영 일선으로 복귀하여 예전처럼 잘살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재벌가의 사람들은 세상만사가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는 모양입니다. 최근 ‘욕설 음성’이 공개되면서 여론을 들끓게 한 조현민 대한항공 여객마케팅부 전무가 그랬습니다. 대한항공이 속한 한진그룹의 3세 경영인으로서, 언론과 인터넷에 나온 이야기들만 죽 이어 봐도 이 사람의 ‘갑질 인생’을 재구성할 수 있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한국의 재벌이나 외국의 슈퍼 부자들이 나오는 영화를 통해 갑질에 관한 몇 가지 생각을 정리해 봤습니다. 갑질이 자라나는 토양과 심리적 배경, 일그러진 초상 같은 것들을 차근차근 짚어 보려고 합니다.

[하나] <하녀>(2010) – 악덕은 어디서 싹트고 자라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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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더스

재벌가의 가정생활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일단 그들을 주변에서 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요즘 경영 일선에 나선 재벌 3세들은 보통 서울 근교에 저택을 지어 놓고 거기서 그들만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상류층 집안에 대한 묘사를 뛰어넘는 다른 차원이겠거니 짐작할 뿐이지요.

그런 면에서 임상수 감독의 2010년 작 <하녀>는 재벌 가족의 모습에 대한 상상력을 효과적으로 자극합니다. 은이(전도연)가 하녀로 들어간 재벌 집 남자 훈(이정재)의 집은 딱 보기에도 일반적인 단독 주택과는 현격히 다릅니다. 아주 높은 천장, 특이한 공간 구분, 색채와 면이 강조된 모던한 실내 디자인 등 집주인의 개성적인 취향을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또한, 모든 것이 재벌 집 가부장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가족 내부의 질서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여기서 슈퍼 갑은 훈입니다. 그가 아무리 하녀를 건드리고 임신시켜도 훈의 아내 해라(서우)와 그녀의 엄마(박지영)는 항의하지 않습니다. 되려 그들은 훈의 아이를 뱃속에 잉태한 은이를 타깃으로 삼습니다. 은이 역시 어떻게든 훈과의 관계를 유지 하고 싶어 하고 아이를 낳으려 합니다. 이들 셋의 목표는 같습니다. 훈이 가진 돈과 권력이죠.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것은 이 집안의 어린 딸 ‘나미’의 미래입니다. 뭐든 자기 취향대로 할 수 있고, 목표를 이룰 수만 있다면 뭘 해도 괜찮다는 분위기의 가정환경은 이 아이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게다가, 그녀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남동생들이 자라면서 상대적 박탈감까지 느낀다면요? 나미가 나중에 커서 갑질하는 사람이 된다고 해도 별로 이상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때는 이 영화 끝에 은이가 죽어가면서 했던 부탁 같은 것은 기억도 안 날 것입니다.

[둘] <베테랑>(2015) – 갑질에 빠져드는 심리적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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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J엔터테인먼트

이 영화에서 유아인이 연기한 조태오는 사상 최고의 망나니입니다. 새파랗게 젊은 친구가 영화 내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형태의 갑질을 깨알같이 보여주기 때문에 더욱 관객의 공분을 자아내는 인물이지요. 사실 이 영화는 낯간지러운 대사가 꽤 있고, 전개상 매끄럽지 못한 부분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13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조태오 같은 악당을 경찰이 시원하게 잡아넣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쾌감을 느꼈기 때문일 겁니다.

3남매 중 째인 조태오의 악행과 망나니짓에는 이복형제들에 대한 열등감이 깔려 있습니다. 어머니가 둘째 부인이라는 것과 어떻게 해도 아버지의 관심을 받기 어려웠던점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패배감을 맛보게 했습니다. 그가 사람들을 종종 장난감 대하듯이 하고 이종 격투기를 빌미로 사람 패는 것을 좋아하며, 마약을 즐겨 하는 것은 그런 기분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었겠죠.

누군가가 유독 남에게 화를 잘 낸다면, 그의 마음속에는 어떤 불안이 자리 잡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갖고 싶었으나 못 가진 것이 있거나, 부족한 점이 있지만 다른 이에게 보이고 싶지 않거나, 자기도 아는 단점을 다른 이가 나서서 지적하며 화를 돋우면 그는 폭발할 것입니다. 조태오가 딱 그런 경우입니다.

물론 열등감이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모든 사람이 화를 내고 갑질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기대치와 현실 간에 차이가 크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라야 화가 증폭됩니다. 집이 재벌이라 어릴 때부터 뭐든 다 할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랐지만, 막상 하고 싶은 일을 하기에는 능력이 모자라거나 서열에서 밀릴 때 그렇게 되는 거죠. 이제껏 ‘갑질 사건’으로 세간에 이름이 오르내렸던 젊은 재벌 3세들의 경우를 하나씩 뜯어 보면, 모르긴 몰라도 조태오의 처지와 꽤 비슷할 것 같습니다.

[셋] <킹스맨: 골든 서클>(2017) – 갑질과 사이코패스, 종이 한 장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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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이십세기폭스코리아

어떤 사람이 누군가에게 마음 놓고 갑질을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는 당하는 사람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런 식으로 난리를 치면 당하는 상대의 기분은 어떨까’라는 생각을 한 번이라도 해 본 사람이라면 막무가내로 상대의 인격을 깔아뭉갤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많은 사람이 상대의 감정을 살피는 대신, 자기 기분 나쁜 것부터 먼저 터뜨리고 말지요.

<킹스맨: 골든 서클>의 끝판왕은 포피 애덤스(줄리앤 무어)입니다. 캄보디아의 밀림 속에 ‘포피 랜드’라는 아지트를 만들고 사는 그녀는 언뜻 보기에 전형적인 교외 중산층 주부 같습니다. 하지만, 인육을 갈아 만든 햄버거를 대접하거나 자기가 기르는 로봇 개들로 맘에 안 드는 부하들을 쉽게 죽여 버릴 정도로 잔혹한 여성입니다.

포피는 하는 짓을 봤을 때 공감 능력이 극히 떨어지는, 자기중심적인 사이코패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사고방식과 부하들을 다루는 태도를 보면 요즘 회자되는 갑질 사례들과 이상하게 겹치는 구석이 많습니다. 그녀의 행동을 대한민국 어딘가의 사무실이나 작업장으로 옮기더라도 전혀 위화감이 없을 것 같아요.

이렇듯 반복되는 갑질과 사이코패스 사이에는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만약 갑질하는 사람들이 ‘내가 범죄를 저질러도 처벌받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만 있다면 범죄를 저지르고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베테랑>에서 나왔던 조태오처럼요.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것은 한 번이라도 당하는 사람의 심정을 진심으로 헤아려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고칠 수 있습니다. 이 영화의 포피처럼 직접 당할 때까지도 깨닫지 못한다면 참담한 결말만 남을 것입니다.

[넷] <올 더 머니>(2017) – 갑질 인생의 황혼, 처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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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씨네마(주)

타고난 사업가인데 운까지 좋아서 ‘제국’이라고 부를 만큼 회사를 키운 남자가 있습니다. ‘협상의 천재’라고 불리며 사우디아라비아 부족과의 담판을 통해 석유 채굴권을 따낸 폴 게티(크리스토퍼 플러머)가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전형적인 미국식 자수성가형 부자의 전형이죠. 그런데 돈에 대한 집착이 너무 강해 돈다발을 꼭 쥔 채 모든 사람에게 갑질을 하며 평생을 살았습니다.

이 영화는 폴 게티의 손자가 유괴되면서 시작합니다. 유괴범들은 손자의 몸값을 요구합니다. 며느리 게일(미셸 윌리엄스)은 아들을 구하기 위해 시아버지를 설득합니다. 그렇지만, 폴 게티는 돈 대신 CIA 출신 협상 전문가 플레처(마크 월버그)를 붙여 주며 끝까지 협상을 통해 돈을 낮추기를 원합니다.

혈육이 유괴됐는데도 차일피일 몸값 주는 것을 미루는 폴 게티의 모습을 보면 정말 심하다는 생각밖에 안 듭니다. 그는 앞서 세 영화에서 본 갑질 캐릭터의 면모를 모두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가부장제의 정점에 선 인물이며, 누구에게든 갑질하는 데 이골이 나 있고, 공감 능력이 무척 떨어지는 사람이지요.

결국 그에게선 죽을 때까지 돈과 권력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 있을까요? 인생에는 돈과 권력 말고도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진심 어린 사랑, 희생할 줄 아는 마음, 인격적 존중 같은 인간적인 가치는 언뜻 보기에는 탁상공론인 것 같지만, 삶의 어느 때건 다가와서 우리에게 힘을 불어넣어 줍니다.

사실, 갑질은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들의 전유물은 아닙니다.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도 지위가 좀 높다고, 좀 더 책임 있는 자리에 있다고 그런 행동을 할 때가 있습니다. 갑질이라고 뭉뚱그려서 이야기하지만, 그 안에는 다양한 상황과 감정이 들어있을 것입니다. ‘어쩔 수 없다’, ‘이렇게 안 하면 일이 안 돌아간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도 된다’ 등등.

이유는 다 좋습니다. 그런데, 한 번쯤 뒤로 물러서서 상대의 입장이 되어 볼 필요가 있어요. 그리고 그들에게 물어봅시다. 내가 이래도 괜찮은지. 내가 생각하는 ‘갑질’의 이유에 대해 동의하는지. 아니라는 대답을 들었다면 바꿔야 합니다. 자기 행동을 돌아보고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무슨 영광을 보겠다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면서까지 살아야 하나요?

설령 그렇게 살아서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지게 된다 하더라도, 그것을 나눌 사람이 없다면 아무 소용 없는 일입니다. 폴 게티가 죽은 후, 그의 소장품 모두를 기증해 무료 공공 미술관을 만든 게일과 다른 상속인들의 결정은 그래서 훌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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