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The Shape of Water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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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2017. 2. 22. 개봉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기와 다른 모습을 한 사람을 껄끄러워합니다. 이런 ‘불편한 감정’은 인간 사회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차별 행위의 원인이 될 때가 많습니다. 성별, 피부색, 장애 유무 등 눈으로 구분할 수 있는 차이만을 강조하다 보면, 상대방도 생각과 감정을 지닌 사람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폭력적인 행동을 하기가 쉬우니까요.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은 이러한 차별 행위에 맞서는 연대의 힘을 아름답게 그려낸 우화입니다. 엘라이저(샐리 호킨스)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수는 있지만, 소리 내서 말할 수는 없는 장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래된 고전 영화 상영관 윗층에 세 들어 사는 그녀는 이웃의 나이 먹은 화가 자일스(리처드 젠킨슨)와 친한 사이입니다.

엘라이저는 야간 환경미화원으로 미국 항공 우주 센터의 비밀 실험 기지에서 일합니다. 어느 날 기지에는 물 속을 헤엄쳐 다니는 괴생명체가 반입되고, 그녀는 직장 동료인 흑인 여성 젤다(옥타비아 스펜서)와 함께 이 사실을 우연히 목격하게 됩니다. 이 생명체에 다가간 엘라이저는 곧 그와 간단한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끔찍한 마초의 전형인 보안 담당자 스트릭랜드(마이클 섀넌)가 고문과 폭력을 일삼으며 그들 위에 군림합니다.

차별과 폭력의 시대에 등장한 괴생명체

이 영화의 배경이 된 1960년대 초반의 미국은 대외적으로 소련과의 냉전이 정점을 치닫던 시기였고, 국내에서는 50년대부터 시작된 흑인 민권 운동이 차츰 치열하게 전개되기 시작하던 때입니다. 이 영화가 적나라하게 비판한 노골적인 반공 이데올로기와 국가주의, 성 차별 및 인종 차별, 성 소수자에 대한 멸시 등이 사회의 보편적인 분위기였죠.

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는 스페인의 30년대 파시스트 정권 시기 문제를 언급한 기존 작품 <판의 미로>(2006)에서도 그랬듯이, 시대와 사회의 문제를 판타지에 자연스럽게 녹여내는 솜씨를 또 한 번 발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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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우선, 단순하지만 흡인력 강한 스토리가 돋보입니다. 중심 줄거리만 놓고 보면 그다지 복잡할 게 없지만, 엘라이저와 친구들을 방해하는 세력들을 잘 활용함으로써 긴장감과 스릴을 최대한 끌어올렸습니다. 영화 보는 내내 시간이 너무 잘 가서, 다 보고 나면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나?’ 싶을 정도죠. 흔히 아트하우스 영화라고 하면 으레 간접적이고 모호한 표현을 시도하기 마련인데, 이 영화는 감독의 다른 영화들이 그렇듯 정확하게 할 말을 다 하는 편입니다.

특히, 프로덕션 디자인(production design: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미술이라고 부르는, 분장이나 의상부터 세트 디자인까지 영화의 시각 디자인 전체를 총괄하는 파트)이 훌륭합니다. 공간별 콘셉트에 맞는 색채와 디자인이 튼튼하게 구축된 것은 물론, 개별 요소들의 조형적 아름다움도 뛰어나거든요. 그와 맞물려 돌아가는 촬영과 편집, 음악도 전반적으로 매우 높은 수준의 완성도를 보여줍니다.

배우들의 연기도 좋습니다. 대사 없이 몸짓과 눈빛, 표정만으로 풍부한 감정을 표현하는 샐리 호킨스는 꿈결 같은 장면들을 여럿 선사합니다. 여러 편의 영화에서 그녀의 연기를 봐왔지만, 그동안 미처 감지하지 못했던 장점들이 보석처럼 빛납니다. 늘 그녀의 편이 되어주는 리처드 젠킨스와 옥타비아 스펜서의 연기도 빼어납니다. 그들이 함께 한 여러 가지 재미있는 에피소드들도 기억에 남지만, 같은 소수자로서 다른 이에게 기꺼이 연대하는 모습이 감동을 주었습니다.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은 작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과 음악상 등을 받았고, 올해 있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 감독, 배우 등 주요 부문과 기술 부문을 망라한 13개 부문 후보에 오른 것으로도 화제를 모았습니다. ‘소문난 집에 먹을 것 없다’는 속담도 있지만, 이 영화에는 전혀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다만,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 작품답게 특유의 동화적 낭만과 기괴하고 잔혹한 묘사가 공존하기 때문에, 이런 부분을 불편하게 느낄 관객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표현하고자 한 것은 삶의 양면성입니다. 이 세상은 꿈과 희망만 품고 살아갈 순 없는 곳이며, 방 밖을 나서면 언제나 냉혹한 현실이 존재합니다. 영화 속에서 프레드 아스테어나 진 켈리 같은 전형적인 뮤지컬 스타가 아니라, 갱스터 물과 뮤지컬 코미디를 오가며 연기했던 제임스 캐그니가 언급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변화는 진심어린 공감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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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이 영화의 주제는 차별과 폭력에 맞서는 연대입니다. 차별 행위는 언제나 폭력을 동반합니다. 다른 것을 다르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구별’일 뿐이지만, 다수에 속한 사람이 소수자인 상대에게 주먹을 휘두르면 ‘차별’이 됩니다. 이 영화에서 스트릭랜드가 엘라이저와 젤다를 자기 사무실로 불러 조사하는 장면은 여성, 흑인, 장애인에 대한 혐오와 차별 행위가 한순간에 집약된 잊을 수 없는 장면이었습니다.

요즘 폭로된 우리 사회의 성추행 및 성폭력 사건들도 똑같습니다. 한국 사회에 만연한 성차별과 여성 혐오 정서가 얼마나 심각한지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였으니까요. 어떤 인간들은 최근 1, 2년간 여성 혐오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그런 게 어디 있냐’는 식으로 묵살하려 들었습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 곳곳은 이미 드러나지 않은 폭력으로 시커멓게 얼룩진 지 오래입니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우리 남자들은 가해자로 드러난 몇몇을 강하게 비난하고, 자기가 저질렀을지도 모르는 가해 및 방조 행위를 반성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런 행동이 근본적인 해결이나 변화를 이끌어내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여성의 입장에 공감하려는 노력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말이나 행동을 하는 것보다, 피해자의 고통을 내 것처럼 여기고 진심으로 아파하며 공감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더 필요합니다. 그래야 여성을 단순히 성적 욕구를 해소하는 대상으로 이용하려 들지 않고, 사회의 동등한 구성원으로 존중하는 기반이 조성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영화에는 대조적인 두 남성이 나옵니다. 한 명은 화가 자일스입니다. 성 소수자인 그는 괴생명체가 자기 고양이를 무참하게 죽여버렸음에도 끝까지 그의 편에 섭니다. 성 정체성 때문에 괴물 취급당했던 기억은 그의 처지에 공감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반면, 젤다를 평생 가정부처럼 부려 먹은 남편 브루스터는, 같은 흑인인 아내 대신 백인 스트릭랜드의 편에 서버립니다. 아내가 겪어 온 어려움과 고통에 전혀 공감할 수 없었기 때문이죠.

이 두 남자는 둘 다 사회적 소수자로서 불편과 고통을 겪은 적이 있었을 테지만, 상대에 대한 공감 능력에 따라 완전히 다른 선택을 하고 맙니다. 한국 사회의 대다수 남자들은 성 정체성이나 인종으로 차별받은 경험이 별로 없으니 이들과 좀 다르긴 할 겁니다. 하지만, 우리 역시 사회 경제적 여건이나 지위 때문에 차별받은 경험은 많습니다. 따라서 여성의 처지에 대해 공감 능력을 발휘하지 못할 이유도 없지요. 우리 사회가 진정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한국 남자들이 선택해야 할 길이 어느 쪽인지는 너무나 자명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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