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력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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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 31. 개봉

초능력을 가진 주인공이 나오는 이야기는 언제나 흥미롭습니다. 일상에서는 꿈도 꾸지 못한 일들을 해내는 주인공의 모습 자체도 신기할 뿐더러, 기존 질서를 뒤집는 주인공의 활약에 대리 만족을 느끼게 되거든요. 최근 들어 슈퍼 히어로 영화가 주목받게 됐지만, 이런 이야기 자체는 어느 문화권에서나 전해 내려오는 매우 전형적인 서사입니다. 초인적인 힘을 가진 주인공은 우리나라 전래동화에도 심심찮게 등장하는 소재죠.

<염력>도 외견상으로는 매우 전형적으로 보입니다. 독특한 맛의 치킨집으로 명성을 얻었지만, 재개발로 가게를 내놓아야 하는 루미(심은경)에게는 어렸을 적 빚보증을 잘못 서 집을 나간 아빠 석현(류승룡)이 있습니다. 철거 용역들과 실랑이 중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루미는 그간 연락을 끊고 지내던 석현에게 도의상 연락을 합니다.

은행 경비원을 하면서 혼자 사는 석현은 동네 약수물을 먹고 몸에 이상한 변화를 느낍니다. 생각만으로 주변 물체를 움직일 수 있게 된 것이 마냥 신기한 그는 이 재주로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연락을 받고 찾아간 아내의 빈소에 가서야 딸 루미가 처한 상황이 급박하다는 걸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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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에 못 미치는 완성도

재작년 여름 <부산행>으로 천만 관객을 모으면서 주목받은 연상호 감독은 차기작으로 물체를 생각만으로 움직일 수 있는 초능력을 가진 주인공 이야기에 도전했습니다. <부산행>은 연출이 아주 뛰어난 작품은 아니었지만, 장르 규칙을 비교적 잘 따라갔고 시각적 아이디어가 훌륭한 장면들이 있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죠. 그에 비교하면 이번 영화는 칭찬할 만한 구석이 별로 없는 실망스러운 작품입니다.

우선, 석현이란 캐릭터가 한 이야기의 주인공을 맡길 수 있을 정도로 잘 다듬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누구도 공감하기 어려운 비호감 인물입니다. 단순히 외모가 지저분한 아저씨라서 아니라, 성격 자체가 그렇습니다. 친구 보증을 잘못 서서 집을 나가게 된 건 그렇다 쳐도, 은행 경비 일을 할 때나 루미와 함께 있을 때나 괜찮은 인간이라는 생각이 안 듭니다. 그는 늘 자기 몸뚱이와 딸 루미 생각밖에 안 하는 이기적인 인물이니까요. 초능력을 얻고 재개발 투쟁에도 가세하지만, 그가 하는 모든 일은 딸에게 자기 존재를 확인받고 싶어 하는 ‘인정 투쟁’에 불과합니다.

비호감 인물이 주인공이더라도 재미있는 이야기로 푸는 방법이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긍정적인 면이 있었다는 식으로 풀거나,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의미 있는 변화를 겪게 만들면 됩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관객은 인물을 이해할 수 있고 점차 그에게 공감하는 단계로 나아가게 되지요. 이 영화에는 그런 게 없습니다.

좋게 생각하면, 감독은 기존의 방식대로 이야기를 풀고 싶지 않았던 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대중 영화에서 관객의 마음을 설득하기 위해 꼭 필요한 요소를 상투적인 공식이라고 치부하고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팥빵에 팥소가 들어가는 게 상투적이라고 해서 팥소가 없는 팥빵을 만들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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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루미라는 호감형 인물에게 초능력을 부여했으면 더 좋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관객이 더 쉽게 공감할 수 있었을 겁니다. 굳이 아버지까지 등장시키지 않아도 갈등의 중심축인 재개발 문제와 초능력을 자연스럽게 연관시킬 수도 있는 이점도 있지요. 그런 쪽으로 좀 더 상상력을 발휘했더라면, 이런 좋은 소재가 지금처럼 낭비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이 영화의 캐릭터와 에피소드들이 하나 같이 단순하다는 점입니다. 루미는 좀 나은 편이지만, 영화 속 모든 등장인물은 세부 사항이 생략된 채 개념으로만 존재합니다. 주요 인물인 석현이나 철거를 배후 조종하는 홍 상무(정유미), 용역 회사 사장(김민재), 변호사(박정민) 같은 주요 인물들조차 그냥 ‘어떠어떠한 인물’이라는 몇 줄짜리 콘셉트 안에 갇혀 있지요. 그래서 실재하는 인물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마치 3차원 공간에 2차원 평면으로 된 종이 인형을 넣어놓은 것처럼요.

에피소드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비슷한 소재와 줄거리라면 누구나 떠올릴 법한 평범하고 진부한 상황들이 이어집니다. 물론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뻔한 장면이라도 보통 사람들이 잡아내지 못한 감독만의 신선한 시각이나 창의적인 발상이 있어야 재미를 줄 수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는 홍 상무가 용역 회사 사장과 식사하는 장면이나 용역 직원들 영수증 처리하는 장면 정도를 빼고는 그런 게 별로 눈에 띄지 않습니다.

그 밖에, 이런 종류의 영화를 보러 온 관객들이 기대할 법한 시각 효과나 액션 장면이 주는 쾌감이 약합니다. 주인공이 도시 위 허공에 떠 있는 이 영화의 포스터 디자인은 관객에게 어떤 통쾌함과 후련함을 기대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영화 속에는 그런 느낌을 주는 장면이 거의 없습니다.

이는 CG 기술의 문제라기보다는 연출의 문제입니다. 관객 입장에서 입이 떡 벌어지거나 놀라도록 보여주지 않습니다.  대신, 이 영화는 자꾸 석현의 초능력에 놀라는 영화 속 인물들의 반응을 보여 주려 합니다. 영화 속 인물들이 추임새 넣듯 석현의 초능력에 대해 놀라고 이야기하는 장면들이 반복되면서, 관객은 오히려 그의 초능력을 아무 느낌 없이 보게 됩니다. 이런 감정 상태에서는 어떤 장면이 나오더라도 탄성을 지르기 힘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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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을 다루는 방식

이 영화에는 2009년에 있었던 용산 참사를 연상시키는 요소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재개발 반대 농성, 경찰과 용역이 합세하여 토끼몰이식으로 진행된 진압, 그 과정에서 등장하는 컨테이너, 에필로그에 등장하는 공터가 돼버린 현장 같은 것들이 그렇습니다.

의도는 좋습니다. 일반 사람들은 거의 잊고 지냈던 사건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한다는 데 의미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런 의도가 제대로 효과를 발휘했는지는 의문입니다. 재개발 투쟁 자체가 소시민 아버지의 인정 투쟁을 꾸며주는 장식처럼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철거민은 피해자, 공권력은 가해자라는 단순한 선악 구도를 아무런 세부 사항 없이 던져 놓은 것이 제일 문제입니다. 점포 세입자들이 다른 곳으로 이주해서 생계를 이을 만한 적절한 보상이 이뤄지지 않는 것이 재개발 갈등의 핵심임에도 그런 부분은 제대로 다뤄지지 않습니다. 영화에는 그저 철거민과 용역 간의 물리적인 대결만 나올 뿐이지요.

물론 100억 넘는 제작비가 들어간 상업 영화에서 이렇게라도 언급하는 게 어디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했을 경우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는 점을 신중히 고려했어야 합니다. 실제로 이 영화를 보고 일부 관객은 ‘정치적 프로파간다’라고 비아냥대기도 하니까요. 한 주 먼저 개봉한 다큐멘터리 <공동정범>이 같은 소재를 돌다리도 두드려 가는 식으로 조심스럽게 다룬 태도와 정말 많이 비교되는 지점입니다.

인류사를 통틀어 대중적으로 소비되는 이야기 공식은 몇십 개 내외라고 합니다. 비범한 능력을 갖춘 주인공이 등장하는 이야기 역시 그중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걸 보여주고 싶다고 해서 무리하게 공식을 포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이야기가 진부하고 뻔해지는 이유는 공식 때문이 아니라, 작가만의 참신한 시각이나 디테일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이니까요. 오히려 정해진 공식은 상투성을 뛰어넘으려는 작가의 노력을 자극하여 창의적인 결과물을 내기도 합니다. <염력>이 지닌 여러 가지 문제점은 대부분 그런 노력이 부족했던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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