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남자의 미래다(2004)가 남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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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영화를 봐왔지만, 극장에 불이 꺼지고 커다란 스크린이 밝아져 영화가 시작되는 순간의 설렘은 여전합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영화를 보는 눈은 달라졌지만, 기대와 궁금증이 뒤섞인 채 배급사 로고를 보면서 본편 시작을 기다릴 때의 기분은 앞으로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지금보다 더 혈기왕성하던 젊은 시절에는, 극장에서 보게 될 영화가 정말 재미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습니다. 그래서 기대에 못 미치는 영화를 보면 크게 실망할 때도 많았죠. 그중에서도 홍상수 감독의 다섯 번째 연출작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2004)는 특별히 아쉬웠던 작품입니다.

대학교 강사 자리를 잡은 문호(유지태)는 그의 대학교 시절 선배인 헌준(김태우)과 오랜만에 만나 술을 마시다가, 예전에 두 사람 모두와 관계를 맺었던 선화(성현아)를 떠올립니다. 결국, 두 사람은 부천의 한 호텔에서 술집을 하는 그녀를 무작정 찾아가 밤을 보내게 됩니다.

주목받던 감독의 최신작

홍상수 감독은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로 깜짝 놀랄만한 데뷔를 했습니다(저는 아직도 이 영화가 한국영화 사상 가장 뛰어난 데뷔작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이후 <강원도의 힘>(1998), <오! 수정>(2000) 등의 영화로 자기만의 세계를 갖춘 것으로 주목받았지요. 저 역시 <생활의 발견>(2002)은 좀 아쉬웠지만, 여전히 관심을 두고 볼 만한 감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는 칸 영화제 공식 경쟁 부문 진출작이란 후광도 있었습니다. 덕분에 개봉 직전까지 영화 잡지에 호의적인 기사도 많이 나왔지요. 하지만, 영화제 개막 직전 국내 개봉된 이 작품은 솔직히 실망스러웠습니다. 이런 영화를 뭘 보고 경쟁 부문에 넣은 것인지 칸의 선택 기준이 의심스러울 정도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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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지질한 남성의 이야기’라는 점에서는 그때까지 나왔던, 그리고 최근에도 나오는 홍상수 감독 작품과 크게 다를 바 없었습니다. 맘에 드는 여자만 보면 어떻게든 자보려 하는 남자들, 위선적인 지식인 캐릭터, 회상하는 주체에 따른 기억의 왜곡과 중첩, 주인공의 내적 불안이 담긴 꿈 장면 등 홍상수 영화의 특징이라 불리는 것들이 모두 들어있지요.

그런데 소재를 다루는 태도는 좀 달랐습니다. 앞선 영화들에서는 자신의 페르소나라고 할 수 있는 남성 주인공을 내세워 그 비루함을 자조하고 풍자하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실제 삶의 모습과 그 속에 담긴 불안을 돌아볼 기회를 제공한다고 생각했죠.

반면, 이 영화에서는 감독이 매우 자기방어적이었습니다. 자신의 우스꽝스러운 부분을 드러내긴 하지만, 이번에는 비난의 화살을 외부로 돌립니다. 감독 자신을 닮은 주인공 문호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인물인 헌준을 내세운 것은 바로 그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헌준의 기억 속에서 재현되는 선화의 모습은 다소 바보스럽게 행동하는 섹스 상대에 지나지 않습니다. 동네 오빠에게 끌려가서 강간당했다고 고백하는 선화를 여관에 데려간 헌준이 깨끗하게 해주겠다며 섹스를 하는 장면은 많은 비평가에게 두고두고 비판받았습니다. 현재의 선화를 다시 만나서 하는 헌준의 행동 역시 확실히 문호보다 지질하고 수준 이하입니다.

반면, 문호와 선화의 관계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내내 비교적 서로 호의를 가진 정상적인 남녀 관계처럼 그려집니다. 두 인물을 이렇게 차이 나게 만든 이유는 결말 부분에서 좀 더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문호는 이튿날 선화의 집 근처에서 우연히 만난 제자들과 술자리를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문호가 여학생에게 성희롱에 가까운 질문을 던지는 것을 두고, 어떤 남학생이 항의합니다. 문호는 여기서 그를 매우 억압적으로 대하죠. 이어지는 장면에서 그 여학생은 문호에게 호감을 보이며 여인숙에 따라가고, 앞서 항의했던 남학생은 여학생을 쫓아 방 앞까지 왔다가 갑니다. 이 상황을 두고 문호와 여학생은 대화를 나눕니다. 이를 통해 영화는 문호가 술자리에서 정상적인 ‘플러팅’을 했을 뿐이며, 남학생의 항변은 여학생을 일방적으로 좋아했기 때문이었다는 식으로 정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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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변명과 합리화에 불과했던 건 아닐까

이전까지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볼 만했던 이유는 인간이 가진 성적 욕망과 그것을 생각대로 이루지 못하는 현실 사이의 갈등이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동물적 욕망은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지만, 하나의 사회적 존재로 살아가려면 그 욕망을 적절히 제어할 줄 알아야 합니다. 본능을 길들이는 것은 위선적인 행동이 아니라, 동물이 아닌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 짊어진 숙명이니까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는 아주 달랐습니다. 영화 속에서 문호의 욕망에 대한 현실적 제약은 거의 없습니다. 아내는 인터폰 속의 목소리로밖에 존재하지 않고, 그가 욕망을 채우고 싶어 할 때 여자들은 쉽게 응합니다. 그의 유일한 걱정은 제자와 여인숙에 간 것이 소문나서 교수가 되는 데 문제가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지만, 영화 끝에 잠깐 등장하고 말아버릴 뿐입니다.

결국 감독의 태도는 일종의 ‘물귀신 논리’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뭐 그렇게 다르냐. 날 욕할 거 없어, 너희도 똑같으니까’라는 식이죠. 이전까지 보여준 것이 자신을 농담거리로 삼는 풍자적인 코미디였다고 받아들인 저는 충격이 꽤 컸습니다. 어쩌면 이게 감독의 진짜 속내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 이후로는 홍상수 감독에 대해 기대를 많이 접게 됐습니다. 그가 인간의 욕망이 드러나는 겉모습은 잘 포착할지 몰라도, 그 이면에 뭐가 있는지 탐구해 보는 식으로 발전할 여지는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이 영화는 그 당시 자주 봤던 영화 전문지를 그만 보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 잡지는 칸 영화제 전후에도 영화에 줄곧 호의적이었는데, 결국 연말 특집에서 올해의 한국 영화 중 하나로 이 영화를 꼽았습니다. 저는 그 결과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고, 그 뒤로 10년간 정기구독해 왔던 잡지를 끊게 됐지요(이 잡지는 그 후로도 매년 올해의 한국 영화 리스트에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올리고 있습니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가 그 해 칸 영화제에서 별 성과가 없었던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고 생각합니다. 대신 특별 상영작이었던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가 뒤늦게 공식 경쟁작으로 합류한 뒤 심사위원대상을 거머쥐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죠. 참고로 이 해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아무도 모른다>가 남자 연기상을,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감독의 <열대병>이 심사위원상을 받는 등 아시아 영화들이 특별히 주목받았던 해입니다(황금종려상은 마이클 무어의 <화씨 911>이었습니다).

이후, 홍상수 감독의 행보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배경이 되는 장소가 바뀌고 계절이 달라져도 주제 자체는 똑같았죠. 다만 이 영화처럼 거친 속내를 드러낸 경우가 없었을 뿐입니다. 그의 영화는 흥행이 잘 된 적도 없었고, 아트하우스 영화로서 인정받는 기준인 영화제 수상 실적도 별것 없습니다. 프랑스 등 유럽에서 호평을 받는다고는 하지만, 세계 3대 영화제에서 경쟁부문 본상을 받은 적이 없죠. 2010년에 <하하하>가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상을 받았지만 공식 경쟁 부문은 아니었습니다. 2017년이 되어서야 <밤의 해변에서 혼자>로 김민희가 베를린 영화제 여자 연기상을 받으면서 상에 대한 갈증을 조금 풀 수 있었죠.

우리는 영화를 보기 전에 언론 기사나 주변 사람들을 통해 그 영화에 대한 평가를 듣게 됩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참고사항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영화를 직접 보고 느낀 자신의 감상입니다. 창작자가 관객과 소통하는 주된 통로는 작품이니까요. 아무리 인터뷰를 잘 해도 애초부터 작품에 없는 걸 만들어낼 수는 없고, 홍보가 다소 부족했더라도 작품에 내재한 가치가 사라지진 않습니다. 기대했던 것에 비교하면 너무나 실망스러웠던 영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는 제게 이런 깨달음을 남긴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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