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진 킹: 세기의 대결 Battle of the Sexes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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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주의하세요.

제가 빌리 진 킹을 처음 본 것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 본 아버지의 테니스 교본에서였습니다. 테니스의 여러 기본 기술을 보여주는 사진 속에 안경을 쓴 여자 테니스 선수의 모습은 꽤 인상적이었죠. 당시는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와 크리스 에버트가 여자 테니스계를 양분하고 있을 때라 한 번도 경기를 본 적은 없었지만요. 부모님은 그녀가 이들보다 앞서 여자 테니스 최고의 선수였다고 알려 주셨습니다.

그보다 훨씬 더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그녀가 성 소수자였으며, 평생을 양성평등과 성 소수자의 권익을 위해 싸워 왔다는 것입니다. 한국 사회의 통념상 일반 대중 매체나 책에서는 이런 부분을 잘 다루지 않기 때문에, 신경 써서 찾아보지 않는 한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 <빌리 진 킹: 세기의 대결>은 최고의 테니스 선수이자 성 소수자였던 그녀의 참모습을 제대로 확인할 소중한 기회입니다.

수 차례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한 톱클래스 여자 테니스 선수 빌리 진 킹(엠마 스톤)은 1970년대 초반 테니스 협회가 여자부 우승 상금을 남자부보다 터무니없이 적은 금액으로 책정하자 이에 반발합니다. 그리고는 자기와 뜻을 같이하는 여자 선수들을 모아 별도의 토너먼트 투어를 만들죠. 이는 나중에 여자테니스협회(WTA)를 결성하는 모태가 됩니다.

이 시기는 또한 그녀에게 자신의 성 정체성을 깨닫게 해 준 때이기도 했습니다. 우연히 자기 머리를 만져 준 헤어 디자이너 마릴린(안드레아 라이즈보로)에게 한눈에 반한 그녀는 우연한 기회에 그녀와 급속도로 가까워지며 매우 친밀한 관계를 이어가게 됩니다.

한편, 윔블던 단식 우승자이자 테니스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된 바 있는, 50대 중반의 전직 유명 테니스 선수 바비 릭스는 그녀의 행보를 눈여겨봅니다. 다양한 내기와 도박에 중독돼 있던 그는 빌리 진 킹에게 테니스 성 대결을 제안하지요. 큰돈을 벌 수 있는 사업 기회가 되리라 생각한 것입니다.

잊지 못할 세기의 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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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성차별이라는 쟁점을 직설적으로 제시하고, 바비 릭스와의 명확한 대결 구도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이 영화의 장점입니다. 남자들과 동등한 우승 상금을 책정해 달라는 빌리 진 킹의 요구에 대한 협회의 어이없는 대응, 공공연히 여성 스포츠 선수의 관객 동원력과 실력을 비하하는 모습은 공분을 일으킵니다. 그녀의 투쟁은 스포츠계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서 여성의 권익 향상을 위한 요구가 들끓었던 당시의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었죠.

그러면서도 경쟁 상대인 바비 릭스를 무조건 악마로 만들지 않습니다. 바비 릭스는 빌리 진 킹이 너무 나선다고 생각하며 못마땅해하는 성차별주의자입니다. 또한 지독한 도박 중독자이기도 했죠. 하지만, 실력 있는 테니스 선수로 존중받아야 할 만한 선수인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빌리 진 킹이 나중에 밝혔듯이, 그녀가 성 대결에서 그를 꺾기 위해 진지하게 연습했던 것도 그를 선수로서 존중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두 실존 인물의 모습을 스크린에 되살려낸 엠마 스톤과 스티브 카렐의 연기는 정말 눈부십니다. 등장인물의 사소한 버릇부터, 그들의 내면 풍경과 인생관에 이르기까지 한 인간을 총체적으로 구현하는 데 최선을 다합니다.

절정부를 장식하는 두 사람의 테니스 시합 장면 역시 실제 경기 중계를 연상시킬 정도로 잘 만들어져 있습니다. 번개 같은 발리와 날카로운 패싱샷이 오가는 테니스 경기의 재미와 스릴을 제대로 보여줍니다.

다만, 조금 아쉬운 것은 빌리 진 킹의 사생활과 마릴린을 향한 감정을 다루는 부분이 중심 플롯과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별도의 다른 이야기가 독립적으로 진행된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긴밀하게 엮여 있지가 않습니다.

당시만 해도 두 사람의 관계가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았고, 빌리 진 킹의 사회 활동이나 투어 경기에도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갈등이나 불안감을 증폭시키는 요소로 활용하는 데 아무래도 한계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실존 인물이기도 한 마릴린은 나중에 빌리 진 킹에게 재산 분할 소송을 걸어, 그녀가 어쩔 수 없이 커밍아웃하는 계기를 제공하게 됩니다).

공감과 연대, 인간에게 필요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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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미스 리틀 선샤인>(2006)의 부부 감독 발레리 페리스와 조나단 데이톤은 전작에서도 그랬듯이, 세상의 통념에 맞서 연대하고 힘을 합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시 한번 들려줍니다.

빌리 진 킹은 십 대 초반에 다니던 테니스 클럽에서 제대로 된 테니스복이 없다는 이유로 단체 사진을 못 찍은 경험이 있었습니다. 이때 느낀 억울함을 다른 사람이 겪지 않도록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죠. 그녀가 평생 여성의 권익을 위해 싸우고, 성소수자가 차별받지 않도록 노력한 것은 그런 연대 의식의 표현이었습니다.

영화 속에서 빌리 진 킹이 기존 질서에 도전하는 과정 역시 서로 연대하고 도움을 주고받는 일들로 가득합니다. 여자 선수들만의 투어를 꾸릴 때 함께 한 다른 8명의 선수들, 스폰서를 받아 오고 전반적인 운영을 책임진 잡지사 편집장 메레디스, 어떤 상황에서든 빌리 진 킹과 그녀의 테니스를 지지하는 남편 래리 등은 늘 든든한 조력자였습니다. 진실한 사랑을 나눈 마릴린 역시 그랬고요.

반면, 남성 우월주의자를 자임하며 테니스 대결을 신청하고, 숱한 광고로 수익을 올렸던 바비 릭스는 정반대의 상황을 겪습니다. 자신의 기분과 짜릿한 스릴에 지나치게 의존했던 그는 아내에게 버림받습니다. 주변에는 자기 이익을 위해 그를 이용하려는 사람들로 들끓었죠. 어쩌면 그의 패배는 이미 예정돼 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인간에 대해 잘못 알려진 통념 중 하나는 우리가 본질적으로 이기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개별 인간으로서의 삶만 놓고 본다면 맞는 말인 것 같지만, 우리는 혼자서 생존할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내 한 몸 잘살아 보겠다는 이기심은 집단을 이뤄 살아가는 데 걸림돌이 될 뿐이니까요. 오히려 인간의 본능은 타인과 공감하고 연대를 모색하는 쪽으로 진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무척 인상 깊습니다. 치열했던 시합이 끝나고 빌리 진 킹과 바비 릭스는 선수 대기실에서 철저하게 혼자가 됩니다. 그들이 다시 세상에 나오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빌리 진 킹에게는 같은 성 소수자인 의상 디자이너 테드가 있었고, 바비 릭스에게는 그의 아내가 있었죠. 어쩌면 그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경기의 승패를 떠나서 함께 기쁨과 슬픔을 나눌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코트에 나가 사람들에 둘러싸여 기쁨을 만끽하는 빌리 진 킹의 밝은 모습이 쉽게 잊혀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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