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빗 린치 특별전 (17. 11. 15 ~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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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아트시네마

데이빗 린치의 영화를 처음 본 것은 20여년 전 국내에 개봉했던 그의 데뷔작 <이레이저 헤드>(1977)입니다. 도무지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어서 잠은 오는데, 잊을만 하면 기괴한 장면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니, 결국 도저히 잠을 못 자고 끝까지 볼 수밖에 없었던 영화였죠. 그 트라우마 때문에 린치 영화는 한동안 피해 다녔는데, 뒤늦게 비디오로 본 <블루 벨벳>(1986)을 좋게 본 후로 생각을 고쳐먹게 됐습니다.

이렇게 린치의 영화는 특이하고 이해하기 어렵다는 얘기를 많이 듣습니다. 실험 영화에서나 볼 법한 정신분석학에 기초한 이미지들이 난무하고, 서로 다른 시공간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하나로 이어지기 일쑤입니다. 꿈-기억-망상-현실이 명확한 경계 없이 뒤섞입니다. 일반 관객의 통념을 비웃듯이 넘어서는, 도발적인 성 묘사와 빈번한 신체 훼손 장면이 불편한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의 영화 속에 나오는 장면들을 모두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아마도 감독 자신이 아닌 이상 불가능하겠죠. 하지만, 데이빗 린치의 관심이 평범한 미국 중산층의 삶 이면에 있는 무의식과 공포, 감춰진 진실을 드러내는 데 있다는 점을 눈여겨보면 조금 더 쉽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데이빗 린치가 즐겨 다루는 소재와 이야기는 미국의 ‘소프 오페라(soap opera: <올 마이 칠드런>이나 <제네럴 호스피털> 같은, 주 5회 방영되는 주부 대상의 통속적인 멜로드라마)’를 연상시킵니다. 그의 등장인물들은 이중 인격, 불륜과 치정, 기억 상실 등 막장 드라마에 단골로 등장하는 상황에 부닥칩니다.

어떻게든 상황을 봉합하는 것이 목표인 통속극과는 달리, 린치의 영화들은 주요 인물들을 범죄나 사회적 일탈 행위에 연루시켜 갈등을 증폭시킵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의 억눌린 자아가 드러나고, 일상의 이면에 존재하는 또 다른 현실을 엿볼 수 있게 되지요. 그리고 한번 현실 너머의 것을 경험한 사람은 결코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11월 15일부터 26일까지 ‘데이빗 린치 특별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데뷔작 <이레이저 헤드>를 비롯한 대표작 7편이 상영될 예정입니다. 그중 추천작 3편을 골라 봤습니다. 비슷비슷하게 표준화된 영화들을 내놓는 요즘 감독들의 영화와는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자세한 상영 일정과 영화 소개는 서울아트시네마 홈페이지(http://cinematheque.seoul.kr/)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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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픽쳐스

[하나] <블루 벨벳>(1986)

제프리 보몬트(카일 맥라클란)는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지는 바람에 고향 집으로 내려와 아버지의 철물점을 대신 돌보고 있는 청년입니다. 그는 마을 주변에서 우연히 잘린 귀를 발견하고 이웃에 사는 형사에게 신고합니다. 사건 수사에 흥미를 느낀 그는 형사의 딸 샌디(로라 던)와 친해지고, 용의자라고 생각한 재즈 클럽 가수 도로시(이사벨라 로셀리니)의 집에 숨어듭니다.

평화로운 교외 중산층의 삶 이면에 자리 잡은 뜻 모를 공포는 이 영화 전반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자기보다 성숙한 여인과 또래의 미숙한 여자친구 사이에서 겪는 통속적인 삼각관계 안에서 주인공은 생각지도 못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장르 공식에 따라 기계적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는 영화가 만들어낸 환상이 어떤 사회적 무의식에 기초하고 있는지 숙고하게 합니다.

한 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장면들을 선사하는 이사벨라 로셀리니와 데니스 호퍼의 강렬한 연기가 돋보입니다. <트윈 픽스> 시리즈의 주인공 카일 맥라클란과 <광란의 사랑>, <인랜드 엠파이어> 등으로 데이빗 린치와의 인연을 이어간 로라 던의 풋풋한 연기를 볼 수 있습니다.

[둘] <광란의 사랑>(1990)

세일러(니콜라스 케이지)는 룰라(로라 던)와 사랑하는 사이입니다. 그는 자신을 싫어하는 룰라의 엄마 마리에타(다이앤 래드)가 고용한 킬러를 무참하게 살해하고 감옥에 갑니다. 이후, 가석방된 세일러는 어머니 곁을 떠나고 싶어 하는 룰라와 함께 미국의 남부를 가로질러 캘리포니아로 떠납니다.

미국을 대표하는 판타지 <오즈의 마법사>(1939)에는 ‘제대로 양육받지 못한 아이가 꾸는 꿈’이라는 모티브도 있습니다. 이를 포착한 배리 기포드의 소설이 원작인 이 영화는, 도로시-서쪽 마녀의 관계를 룰라-마리에타의 관계로 평행 이동하여 판타지 이면의 현실을 직시합니다. 또한, 범죄의 자장을 벗어나지 못할 운명을 예감하는 세일러의 모습은 영화의 해피엔딩마저도 처연하게 만들지요.

데이빗 린치는 이 영화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으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됩니다. 기존 예술 영화 문법에서 벗어난 이 영화의 사례가 없었다면, 4년 후 쿠엔틴 타란티노의 <펄프 픽션>이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는 일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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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안다미로

[셋]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

자동차 도로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 사고를 당해 기억을 잃은 리타(로라 해링)는 할리우드 스타의 꿈을 안고 LA에 도착한 베티(나오미 왓츠)와 만나 친해집니다. 베티는 오디션을 보러 다니면서도 파편화된 리타의 기억을 되찾기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합니다.

이 영화를 한마디로 요약하는 단어는 ‘꿈’입니다. 이 영화는 그야말로 한낮의 백일몽이자, 원대한 포부를 실현하고자 하는 욕구이며, 밤에 찾아온 비밀스러운 무의식이니까요. 나오미 왓츠의 열연과 로라 해링의 치명적 매력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잔혹한 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로스트 하이웨이>(1997)에서 선보인 뫼비우스의 띠 같은 시공간을, ‘꿈’을 매개로 하여 비교적 깔끔하게 구축한 영화입니다. 후속작 <인랜드 엠파이어>(2006)는 데이빗 린치의 모든 것을 집대성한 것으로 평가받지만, 차원 이동과 인물 변화가 훨씬 더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2001년 칸 영화제 감독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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