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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아트시네마

장 피에르 멜빌은 1949년 장편 영화 <바다의 침묵>으로 데뷔한 이후, 60년대에 전성기를 보낸 프랑스 감독입니다. 그가 데뷔하던 1940년대의 프랑스 영화계는 소설을 각색한 내러티브 중심의 이른바 ’시적 리얼리즘’ 영화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영화 매체만의 독자적인 의사소통 방식을 활용하기보다는 소설을 각색한 시나리오에 매여 있는, ‘영상화된 소설’에 가까웠습니다.

멜빌도 소설을 각색한 영화를 많이 찍었지만, 표현 방식에서는 완전히 다른 길을 갑니다. 특히 영화 매체의 시각적 표현 가능성을 최대한 활용한 개성 넘치는 방식을 선보였지요. 그는 대사로 상황을 장황하게 설명하거나, 관객이 카메라와 편집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매끄럽게 봉합하는 것을 피했습니다. 대신, 역동적인 카메라 워크와 과감한 편집으로 생긴 에너지를 활용하여, 긴장감을 증폭하고 심리적 갈등을 효과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앞뒤가 딱 떨어지는 상황 설명보다는, 컷 몇 개로 인물의 상황을 보여 주고 이를 자연스럽게 이야기에 반영하여 긴장과 갈등을 만들어 가는 것이 멜빌의 특기입니다. 따라서 그의 영화는 전체적으로 완결된 이야기의 맥락을 찾기보다는, 해당 장면에서 인물의 감정과 심리 상황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는지에 집중하면 훨씬 재미있게 볼 수 있습니다.

순수 문학에 가까운 작품들을 각색했던 초기작에서도 그랬지만, 멜빌이 선호한 것은 도덕적 딜레마나 위기에 처해 선택의 갈림길에 선 인물들입니다. 그가 60년대에 범죄물로 화려한 꽃을 피울 수 있었던 데에는 이런 인물들의 역할이 큽니다. 끝이 좋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와 목표를 향해 우직하게 걸어가는 그들의 뒷모습이 주는 감흥은 후대의 여러 감독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멜빌이 태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올해,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암흑의 고독-탄생 100주년 장 피에르 멜빌 회고전”을 준비했습니다. 10월 25일부터 11월 12일까지 열리는 이번 회고전에서는 멜빌이 연출한 14편의 작품(단편 1편 포함)을 모두 상영합니다. 또한, 그에 대한 다큐멘터리인 <코드명 멜빌>(2009)도 함께 상영됩니다.

대표작 <두 번째 숨결>, <그림자 군단>을 비롯해 멜빌의 스타일을 음미할 수 있는 작품 6편을 뽑아 간단히 소개해 보았습니다. 더 자세한 일정과 작품 소개는 서울아트시네마 홈페이지(http://www.cinematheque.seoul.kr)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하나] <두 번째 숨결>(1966)
악명 높은 범죄자 귀 멩다(리노 벤추라)는 탈옥하여 옛 애인 마누쉬를 찾아갑니다. 마침 범죄자들 사이의 다툼에 휘말려 위험에 처한 마누쉬를 구한 그는 경찰의 추적을 피해 마르세유에 은거합니다. 외국으로 도망칠 기회를 잡지만, 돈이 부족했던 귀는 스스로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범죄에 가담합니다.

다른 멜빌 영화보다 설명이 잘 되어 있고 플롯이 잘 짜여 있기 때문에, 멜빌 영화 스타일에 익숙지 않은 사람들도 충분히 몰입해서 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강렬한 흑백 대비가 인상적인 실내 장면, 역동적 카메라 워크, 과감한 생략이 돋보이지요. 특히, 중후반부에 여러 인물이 함께 등장하는 씬에서 보여 준 샷 구성과 편집은 이 작품의 백미입니다.

[둘] <그림자 군단>(1968)
나치 점령기의 프랑스, 레지스탕스를 이끌던 필립 제르비에(리노 벤추라)는 배신자의 밀고로 수용소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는 탈출을 계획하여 성공하고 마르세이유에 있는 조직에 다시 합류합니다. 그리고 밀고자를 찾아내어 처단하는 일을 시작합니다.

흔히 2차대전 시기를 다룬 전쟁에 관한 영화라고 하면 화려한 전투 장면을 기대하기 마련입니다만, 이 영화는 그렇지 않습니다. 밀고와 탈출, 배신자 처단을 위한 암살로 범벅된 조직 내의 고민을 우울한 색채로 다루지요. 이 영화에서 멜빌의 관심사는 침략자에 맞선 영웅적인 행동이 아니라, 조직 내에서 개인이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입니다. 잘 세공된 내러티브보다는 개별 시퀀스나 씬이 주는 감흥과 에너지가 뛰어난 작품이기도 합니다.

[셋] <암흑가의 세 사람>(1970)
출소를 앞둔 코레(알랭 들롱)는 간수로부터 새로운 범죄를 제안받고 파리로 출발합니다. 한편, 프랑스 횡단 열차로 호송되던 보젤(지안 마리아 볼론테)은 극적으로 탈출하고, 그의 호송 담당이었던 마테이 경감이 그를 끈질기게 뒤쫓습니다. 보젤은 도주 중에 우연히 만나게 된 코레와 함께 범죄 계획을 모의하고, 은퇴한 경찰 출신의 명사수 얀센(이브 몽탕)을 끌어들일 것을 제의합니다.

균형잡힌 각본, 파격적인 액션 장면, 유려한 카메라 워크가 어우러진 걸작 케이퍼 영화입니다. 요즘 영화들과는 달리, 주요 인물들을 소개하고 서로 엮이게 하는데 한 시간 이상 걸리지만 하나도 지루하지 않고 흥미진진합니다. 후반부는 케이퍼물의 전형을 따르면서도 서스펜스를 배가하고 인물의 심리를 강조하는 등 멜빌 특유의 터치로 가득하지요.

[넷] <레옹 모랭 신부>(1961)
2차 대전 중 마을이 독일군에 점령당한 프랑스의 작은 마을. 딸과 함께 사는 싱글맘 바니(엠마누엘 리바)는 무신론자이자 공산주의자입니다. 딸이 독일군에게 끌려갈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한 그녀는 가톨릭교회를 찾습니다. 여기서 젊은 신부 레옹 모랭(장 폴 벨몽도)를 만나 신과 인간에 대해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전후에 팽배한 신과 인간에 대한 회의 대신, 관계 회복을 제안하는 멜빌의 독특한 과점이 빛을 발합니다. 전쟁도 결국 인생의 여러 난관 중 하나에 불과하며 이를 이겨 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신뢰 회복임을 힘주어 강조합니다. 시종일관 경쾌한 터치로 이야기를 풀어가면서도 이면에 출렁이는 감정의 격랑을 날카롭게 파헤치는 수작.

[다섯] <사무라이>(1967)
살인 청부업자인 제프 코스텔로(알랭 들롱)는 철저하게 혼자 지내며 치밀한 계획에 따라 살해 임무를 수행하는 사나이입니다. 용의주도하게 나이트클럽 사장을 살해하는 임무를 완수한 그는 경찰의 철저한 수사를 받게 되고, 사건 현장에 있었던 증인들의 지목으로 유력한 용의자가 됩니다.

내러티브 면에서 아쉬운 점은 있지만, 시각 언어만으로 서스펜스 넘치는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멜빌 특유의 스타일이 오롯이 담겨 있는 작품입니다. 특히 초반 30여 분 간을 장식하는 범죄 시퀀스 및 그 이후의 수사 과정은 현대의 어떤 범죄물과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을 만큼 뛰어나게 짜여 있습니다.

[여섯] <밀고자>(1962)
갓 출소한 전과자 모리스 포젤(세르주 레지아니)은 장물아비 질베르를 찾아가 느닷없이 그를 죽이고, 패물과 돈을 숨깁니다. 친구인 실리앙(장 폴 벨몽도)의 장비를 빌려 금고털이를 시도한 모리스는 현장을 덮친 경찰을 피해 도망치다 부상을 입습니다. 평소 경찰 정보원이란 소문이 있던 실리앙은 의심의 대상이 됩니다.

시각적 구성이 뛰어난 작품으로, 강렬한 흑백 대비는 빛과 어둠의 양면성을 동시에 가진 주요 등장인물들의 내면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인물의 진짜 의도가 무엇인지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 갈등과 긴장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 다음 극적으로 해소하는 구성이 좋은 편입니다. 이 작품에 흐르는 허무적 낭만주의는 홍콩 누아르를 이끈 오우삼의 영화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