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캔 스피크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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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엔터테인먼트, (주)리틀빅픽처스

2017. 9. 21. 개봉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에게는 영어를 잘 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 있습니다. 외국인과 대화할 때 어떻게든 영어를 잘 해야 하며, 그게 잘 안되면 자신을 자책하곤 하지요. 또한 본토 발음에 가까워지는 데 무척 집착합니다. 중년 이상의 기성 세대에게는 이런 경향이 좀 더 강하게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이 영화 <아이 캔 스피크>는 영어를 정말 배우고 싶어 구청 직원을 쫓아다니는 할머니의 이야기에서 출발합니다. 새로 발령받은 구청으로 처음 출근한 서울시 9급 공무원 민재(이제훈)는 일 잘하는 원칙주의자입니다. 그런데, 이곳에는 수십 년간 수천 건의 민원을 제기하여 사람들 모두가 껄끄러워하는 할머니 나옥분(나문희)이 있습니다. 시장에서 옷 수선집을 하는 옥분은 주위의 사소한 잘못을 그냥 넘기지 않고 죄다 구청에 민원을 넣어 해결해 버리는 사람입니다.

민재는 옥분에게 번호표를 뽑고 민원 신청서를 적는 등 절차를 지킬 것을 요구하면서 각을 세우지만, 옥분 역시 민재의 요구 사항을 칼같이 지키면서 맞섭니다. 하지만, 영어 공부를 아무리 해도 실력이 안 늘어 고민하던 옥분이, 민재가 영어를 대단히 잘 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상황이 달라집니다. 무턱대고 영어를 가르쳐 달라며 쫓아다니는 옥분 때문에 민재는 점점 더 곤란한 상황에 부닥칩니다.

예고편에서 알 수 있듯, 이 영화의 매력 포인트는 두 배우의 밀고 당기는 환상적인 호흡입니다. 시트콤과 드라마, 영화 등을 통해 이미 자기만의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한 나문희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보여 줍니다. 억척스러움과 자애로움 사이를 자연스럽게 오가고, 제일 우스꽝스러운 모습부터 가장 감동적인 순간까지 천연덕스럽게 연기합니다.

깔끔하게 감정의 핵심을 짚을 줄 아는 이제훈의 연기 역시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감정적으로 오버하지 않으면서도 해당 장면에서 반드시 표현해야 하는 것들을 놓치지 않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대선배와 자연스럽게 연기 톤을 맞추고 장면의 색깔을 만들 줄 아는 것이 그의 진정한 장점입니다.

하지만 두 배우의 연기를 받쳐주지 못한 각본이 좀 아쉽습니다. 인물의 진짜 목표가 초반부터 정확하게 잡혀 있지 않고, 플롯도 엉성하기 때문에 집중력이 떨어질 때가 많습니다. 영화의 모든 요소가 중심 사건과 메시지를 드러낼 수 있도록 단단하게 구축된 것이 아니라서, 주제와 상관없는 장면들도 꽤 많이 등장합니다. 전체적으로 6부작이나 8부작짜리 드라마 시리즈를 2시간으로 요약한 특별판을 보는 느낌입니다.

사실 코미디는 논리적으로 잘 짜인 장면이 필요한 장르는 아닙니다. 맥락과는 아무 상관 없이 등장하는 장면이라도 그냥 웃기기만 하면 모두 용서가 됩니다. 이 영화에서 구청 공무원의 일상을 보여 주는 일화들이나 옥분과 민재가 영어 공부하는 과정에서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반짝이는 장면이 꽤 많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수십 년간 숨겨 온 아픔을 드러내고 세상과 더 잘 소통할 기회를 찾은 여성의 성장 드라마이기도 합니다. 이 점을 부각할 수 있는 더 잘 고안된 이야기가 필요했습니다.

적어도 옥분의 민원왕 인생과 그녀의 과거가 무슨 관련이 있는지, 옥분에게 영어를 배운다는 것이 정말 어떤 의미인지, 민재는 옥분과의 교류를 통해 겪는 변화는 무엇인지 등 초반에 깔아 놓은 여러 설정에 대한 의문들은 명확하게 풀어 줬어야 했습니다. 물론 관객이 어느 정도 짐작으로 자기만의 해답을 가질 수 있는 부분들이지만, 이야기 안에서 정확하게 답을 제시해 줬더라면 영화의 감동은 훨씬 배가되었을 것입니다.

이제까지 위안부 소재 영화라고 하면 위안부 할머니들의 참혹했던 경험과 상처에 초점을 맞춘 무거운 드라마나 다큐멘터리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삶의 현장에서 소소한 행복을 발견하고 씩씩하게 자신의 삶을 꾸려온 할머니들의 모습까지 담아내지 못한 측면도 있었습니다.

<아이 캔 스피크>는 그런 한계를 넘어서려 노력한 작품입니다. 영화 속에서 옥분은 위안부 피해자이지만 스스로 고립되어 살아가지 않고, 어떤 형태로든 사람들과 교류하고 사회에 기여하려는 의욕을 불태웁니다. 구청에 민원을 넣고, 영어 공부에 매진하며, 주위 사람들을 챙기는 등 영화 속 옥분의 모든 행동은 이런 욕구에서 나온 것입니다. 상처로 가득한 과거에 머무는 대신 꺾이지 않는 삶에 대한 의지를 보여 준 것이죠.

또한 옥분과 민재의 진심 어린 교류는 우리 사회에서 여러 가지로 반목을 거듭해 온 노년층과 젊은 세대 사이의 화해와 연대를 모색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나이 많다고 무조건 권위나 연륜을 앞세우지 않고 자기보다 훨씬 어린 사람에게 열린 자세를 보여 준 옥분이나, 어르신들만 할 수 있는 따뜻한 배려에 감사할 줄 아는 민재의 모습은 앞으로 세대 간의 연대에 필요한 자세가 어떤 것인지 잘 보여 주었습니다.

일본은 여전히 위안부 문제에 대해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하기보다는, 지난 정권에서 이뤄진 위안부 합의 같은 꼼수를 부리며 그냥 넘어가려 합니다. 반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은 고령으로 인해 점점 내일을 기약하기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 캔 스피크>처럼 신선한 접근을 시도한, 다양한 형태의 대중문화 작품들이 계속 만들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우리 역사에 대한 관심이 한때의 유행이나 환호에 그치지 않고 꾸준히 지속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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