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메이드 American Made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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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I 코리아

2017. 9. 14. 개봉

각국 정보기관은 모두 국익을 위해 일한다고 한목소리로 이야기합니다. 이들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소속 국가에 이익만 되면 뭐든지 한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민간인을 포섭하여 불법적인 행위를 돕게 만드는 것쯤은 일도 아닙니다.

이 영화 <아메리칸 메이드>의 주인공 배리 씰도 그런 식으로 정보기관의 일을 하게 됐습니다. 1978년, TWA 항공사의 기장인 배리 씰(톰 크루즈)은 반복되는 일상을 지겨워하고 있습니다. 출발지와 도착지만 다를 뿐 매번 단조로운 비행을 해야 하고, 똑같은 안전 수칙대로 행동해야 하는 것이 따분합니다. 그래서 쿠바산 시가를 밀수하는 일에 운반책으로 가담합니다.

어느 날, 자신을 CIA 요원이라 밝힌 남자 쉐이퍼(도널 글리슨)가 배리 앞에 불쑥 나타납니다. 그는 배리의 시가 밀수 건을 꼬투리 잡아, 자기가 추진하는 일에 지속해서 협조하라고 압박합니다. 그가 제안한 일은 비행기를 이용해 중앙 아메리카 공산 반군 조직의 실태를 근접 촬영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러려면 항공사 근무는 포기해야 합니다.

고심 끝에 제안을 수락한 배리는 이 스릴 만점인 임무를 내심 즐깁니다. 비행기로 단숨에 날아가 반군의 총격을 피해 사진을 후다닥 찍고 돌아오는 일이 배리의 적성에 너무 잘 맞았기 때문입니다. 하루는 연료를 채우고 미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데, 인근 마약밀매 조직의 리더들이 찾아옵니다. 비행기로 미국에 마약을 운반해 달라는 제안을 하기 위해서죠.

하늘에서 벌어지는 갱스터물

실존 인물이었던 배리 씰의 일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이 작품은 갱스터물의 이야기 공식을 그대로 따라갑니다. 야심만만한 주인공이 찬란한 성공 가도를 달리지만 결국은 몰락하고 만다는 플롯을요. 다만 그 배경이 뉴욕이나 라스베이거스의 뒷골목이 아니라 루이지애나와 중앙아메리카의 하늘이라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숨 가쁘게 흘러가는 리듬감과 풍자적인 블랙 코미디 톤으로만 따지면 역시 갱스터물의 이야기 구조를 취한 마틴 스콜세지의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와 유사한 느낌입니다.

비행 장면들은 제작비에 비해 규모가 별로 크지 않은 이 영화에 괜찮은 볼거리를 제공합니다. 중남미의 열악한 활주로 상황을 극복해낼 때의 스릴이나, 감시망에 혼선을 주기 위해 루이지애나주 앞바다 멕시코만의 석유시추선들 사이로 날아다니며 마약을 운반하는 장면이 주는 후련함은 웬만한 블럭버스터 영화 못지 않습니다.

배리 씰은 사실 쉽게 감정 이입하기 힘든 캐릭터입니다. 불법을 저지르는 정보기관의 하수인이고, 어쩔 수 없는 희생자라기보다는 자발적 협조자로서 자신도 엄청난 재산을 축적한 인물이기 때문이죠.

톰 크루즈의 매력은 관객이 이런 인물에 대해 느끼는 심정적 거리감을 많이 좁혀 줍니다. 나이를 잊은 듯 해맑은 표정은 마치 죄의식 없는 어린아이처럼 막 나갈 때가 있는 배리의 삶과 무척 잘 어울립니다. CG와 특수효과가 난무하는 블럭버스터 영화에서는 잘 느낄 수 없었던, 배우로서의 매력을 온전히 감상할 기회였습니다.

이 영화는 아쉽게도 극 전체를 관통하는 명시적인 갈등 구도가 없습니다. 물론 배리는 영화 내내 갖가지 어려움을 헤쳐 나가기는 합니다. 하지만, 개별 갈등 상황은 극복하고 나면 그만이라서, 다음 상황이 등장하기 전까지 전개가 느슨해지곤 합니다. 다른 주요 인물과 영화 내내 힘을 겨룰 굵직한 갈등 요소를 넣거나, 스스로의 내적 결함 — 과도한 욕심이든 심리적 컴플렉스든 — 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짰더라면 훨씬 효과적이었을 것입니다.

80년대 미국 중남미 정책의 그늘

배리 씰이 겪는 ‘모험’은 78년 카터 행정부 시절부터 80년대 중반 레이건 시대까지 미국 중남미 정책의 양상을 정확하게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좌파 반군에 대한 단순 정찰과 감시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다 좌파 정권이 들어서자 이에 맞서는 반군을 조직하고 자금과 무기를 대는, 내정 간섭에 가까운 적극성을 띠는 쪽으로 확대됩니다. 그 결과 애초 의도와는 달리 마약 카르텔이 성장하는 등 부작용을 낳았습니다.

이런 대외 정책 기조 속에서 배리에게 엄청난 일들을 사주하는 쉐이퍼는, 국가 기관이 권력을 얼마나 어이없이 남용하는지 잘 보여 주는 예입니다. 쉐이퍼가 조직 내에서 존재감을 유지하기 위해 배리에게 제공한 예산은 절대 적지 않은 수준입니다. 이 분에 넘치는 특혜는 고스란히 배리의 가족과 마약 카르텔을 살찌우는 식으로 확대 재생산됩니다.

모든 정보기관과 그 요원이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국익’이란 단어가 언제나 ‘나라 전체의 이익’을 뜻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많은 경우 그들은 나라의 기득권층이나 정권의 이익을 위해, 아니면 자신의 입신양명과 이익을 위해 열심히 일할 뿐입니다.

요즘 쟁점이 된 이명박 정권 시절 국정원의 행태도 마찬가지입니다. 2012년 대선 과정에서 여론을 조작하기 위해 온라인 댓글 부대를 동원하고, 정권 초부터 문화 예술계 블랙 리스트를 작성해 직업 활동의 자유를 공공연히 침해한 사실이 알려지며 파문이 커지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여론을 자기 입맛에 맞게 주무르면서 정권을 보위하고 보수 정권의 연장을 꾀한 것으로 ‘국익’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습니다.

여기에도 민간인 협력자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원래 이런 ‘깃털’들의 운명이란 정치적 상황이 조금만 바뀌어도 쉽게 위태로워지기 마련입니다. 당시에는 명백한 불법을 저지르면서도 절대 아무 문제 없을 거라 믿었겠지만, 이 영화에서 배리가 그랬던 것처럼 상황은 금세 바뀌고 맙니다.

국정원을 도와 불법을 저지른 이들이 미리 반성과 사죄, 양심선언 같은 걸 한다면 좋겠지만 그건 순진한 바람에 불과할 것입니다. 자기 목에 칼이 들어오지 않는 이상 그럴 리가 만무하니까요. 아무쪼록 지난 정권에서 국정원이 저지른 악행에 대한 수사가 철저하고 강력하게 이뤄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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