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토믹 블론드 Atomic Blonde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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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그루(주)키다리이엔티

2017. 8. 30. 개봉

할리우드 액션 영화에서 여성 영웅의 역사를 새롭게 쓴 배우는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린다 해밀턴이나 <에일리언> 시리즈의 시고니 위버를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터프하면서도 모성애를 갖춘 인물을 연기한 이들의 존재는, 더는 여성이 액션 영화에서 주변적인 역할에 머물 필요가 없다는 선언과도 같았습니다.

이 영화 <아토믹 블론드>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2015)에서 액션 스타로서의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 준 샤를리즈 테론의 첩보 액션물입니다. 다양한 상황에서 남성을 능가하는 격투 실력을 보여 준다는 점이 큰 기대를 모았지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직전인 89년 11월, 영국의 첩보 기관 MI6 소속 요원 한 명이 살해당하고 그가 확보한 스파이 명단이 사라집니다. MI6의 실력파 요원 로레인(샤를리즈 테론)은 범인을 잡고 첩보원 명단을 확보한 후, 이 정보를 제공한 동독의 협력자 암호명 스파이 글라스(에디 마산)를 탈출시키라는 명령을 받고 베를린으로 급파됩니다.

하지만 베를린에서 MI6의 괴짜 지부장 퍼시벌(제임스 맥어보이)과 접선하기도 전에 소련의 KGB 요원들의 습격을 받는 등, 임무를 완수하는 과정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로레인은 프랑스 첩보원 델핀(소피아 부텔라) 등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한 걸음씩 나아갑니다.

훌륭한 액션, 느슨한 이야기

겉보기에는 매혹적인 금발 미녀지만, 어떤 상황에서든 주눅 들지 않고 우직하게 상황을 돌파하는 로레인은 분명 인상적인 캐릭터입니다. 모델 뺨치는 패션 스타일과 일류 격투기 선수도 울고 갈 뛰어난 액션 실력은 부자연스런 조합인 것 같지만, 샤를리즈 테론이 연기하면 전혀 위화감이 없어집니다.

다양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로레인의 격투 장면들은 이 영화를 가장 빛나게 하는 요소입니다. KGB 요원들과 좁은 차 안에서 벌이는 격투나 고무호스 같은 지형지물을 활용한 액션 등은 하나도 버릴 만한 장면이 없습니다.

특히, 스테디캠을 활용한 절정 부분의 격투 시퀀스는 이 영화의 백미입니다. 근접 거리에서 격투 중인 인물을 따라다니는 카메라는 마치 싸움 한복판에 있는 것 같은 생생한 현장감을 전해 주지요. 같은 날 개봉한 <킬러의 보디가드>에도 비슷한 형식으로 촬영된 장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토믹 블론드> 쪽이 더 길이도 길고, 수평적 움직임뿐만 아니라 계단을 활용한 수직적 움직임을 잡아내는 등 훨씬 더 높은 수준의 완성도를 보여 줍니다.

다만, 약점이 있다면 이야기에 긴장감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점입니다. 적국 정보원, 이중간첩, 첩보원 명단의 존재 등 첩보물에서 자주 등장하는 요소들로 구색은 갖추고 있지만, 흥미진진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엎치락뒤치락하는 영화일수록 주인공의 생각이나 감정에 대해 — 설령 나중에 그것이 거짓이었음이 판명되더라도 — 관객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인공의 입장이 되어 실패하거나 배반당하진 않을까 싶어 조마조마한 느낌으로 영화를 보게 되죠.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로레인이 장면마다 어떤 의도를 갖고 움직이는지 모호할 때가 많아 긴장감을 느끼기가 힘듭니다.

감독 데이빗 레이치는 스턴트맨이자 무술 감독 출신으로, 키아누 리브스가 주연한 <존 윅> 1편을 공동 감독한 바 있습니다. 이 영화도 <존 윅>처럼 좀 더 단순한 스토리를 바탕으로 쉴 틈 없는 액션을 보여 주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습니다. 지금 상태로는 수준 높은 액션 장면들을 보기 위해 기다리는 시간이 좀 길게 느껴집니다.

새로운 여성 영웅, 한국은?

흔히 여성 액션 영웅이 등장하는 영화들은 여성의 투쟁 과정이 그럴듯해 보이도록 감정적 근거를 만들어 주려 합니다. 모성애, 이성에 대한 사랑, 부당한 처우에 대한 복수심 같은 것들을요. 여기에는 ‘오죽했으면 여자가 저럴까’ 하는 식의 성차별적 뉘앙스가 깔려 있습니다. 남성 주인공은 단순히 첩보 요원이거나 킬러, 갱스터 같은 직업상의 이유만 갖춰도 모험의 근거를 쉽게 확보하곤 하니까요.

<아토믹 블론드>의 경우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주인공 로레인은 사적인 감정이 아니라 철저히 직업적 판단에 기초하여 행동합니다. 그녀는 첩보원으로서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비정한 사투를 벌이며 뚜벅뚜벅 나아갑니다. 이 점이 바로 이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부분입니다.

최근 들어 이런 여성 캐릭터는 서구 영화에서 자주 눈에 띕니다. 올해 개봉작인 <미스 슬로운>의 제시카 차스테인이나, <엘르>의 이자벨 위페르가 연기한 인물들이 그랬습니다. 이들 역시 냉철한 판단과 실행 능력을 갖추고 자신의 인생을 관리합니다. 이런 인물들의 출현은 서구 사회에서 여성의 위상과 성 역할에 대한 관점이 변화한 것과 관련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와 비교하면 최근에 나온 우리나라의 여성 주인공 영화들은 인물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설정 부분이 여전히 전통적인 성 역할 안에 갇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차이나타운>(2015)의 일영이나 <악녀>(2017)의 숙희가 변화를 일으키는 계기는 이성에 대한 호감입니다. <비밀은 없다>(2016)의 연홍을 움직이는 동력은 모성애죠.

이렇게 구태의연한 설정을 창작자의 게으름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영화는, 특히 대중적인 상업 영화는 사회의 통념과 분위기를 뒤따라가는 매체이지 기존에 없던 것을 새롭게 만들어 내는 데 적합한 도구는 아닙니다. 흥행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한국 대중 영화에서 더 신선한 여성 캐릭터를 보고 싶다면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고 편견을 바로잡는 데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매년 세계 여성의 날에 발표되는 이코노미스트지의 ’여성 유리천장 지수’에서 OECD 최하위권을 기록한 한국 대중 영화의 수준은 거기서 거기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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