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이아이피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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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너브러더스 코리아(주)

2017. 8. 23. 개봉

박훈정 감독은 <부당거래>와 <악마를 보았다> 같은 화제작의 시나리오 작가로 먼저 이름을 알렸고, 두 번째 연출작인 <신세계>로 500만 관객 동원에 성공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연출 데뷔작 <혈투>는 거의 관객이 들지 않았고, 제작비 170억이 투입된 세 번째 작품 <대호>가 흥행에 크게 실패하는 등 롤러코스터 행보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 영화 <브이아이피>는 그의 신작입니다. 남한에 기획 입국시킨 북한의 중요 인물을 두고 CIA와 국정원, 경찰청, 북한 보안성까지 힘을 겨루는 설정이지요.

북한 권력층 실세의 아들 김광일(이종석)은 잔인한 살인 행각으로 문제가 되지만 권력의 비호를 받아 한 번도 처벌받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권력 핵심부에서 배제된 후에는 CIA와 국정원의 도움으로 남한으로 기획 입국하게 됩니다.

연쇄 살인 사건 수사를 맡은 경찰 채이도(김명민)는 이 사건이 김광일의 소행임을 알고 검거에 나서지만, VIP 대우를 받는 김광일의 신병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CIA의 요청으로 김광일을 보호하는 국정원 요원 박재혁(장동건)에게 저지당하죠. 눈앞에 있는 살인범을 보고도 붙잡아 넣지 못하는 현실에 격분한 채이도는 김광일을 무조건 잡아넣기로 결심합니다.

일단 이 영화의 발상 자체는 좋은 편입니다. 아무리 극악한 살인마 사이코패스라도 권력의 비호를 받으면 잡을 수 없다는 설정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러나 이런 발상을 재미있고 설득력 있는 이야기로 만드는 데 필요한 작업이 전혀 안 되어 있는 것은 문제입니다.

살인마를 비호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정보기관의 이익, 범죄 사실을 증명하기 위한 경찰의 노력, 사이코패스 살인마의 사고방식과 행동 패턴 정도는 지금보다 더 심도 있게 준비해 놓았어야 했습니다. 이야기의 중요한 전환점을 만드는 방법 역시 별로 심사숙고한 흔적이 안 보이는 상투적인 수법에 의존하는 것도 아쉬운 점입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등장인물과 관객 사이의 감정적 연계가 잘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관객은 영화에 쉽게 몰입하지 못하고, 전체 2시간이 넘는 상영 시간 대부분을 별 감흥 없이 보내게 됩니다. 마치 속이 텅 빈 뻥과자 먹는 것처럼요. 많은 관객의 호응을 얻는 것이 최우선 목표인 대중 영화로서는 치명적인 결함입니다.

우선, 영화에서 ‘착한 편’ 역할을 하는 채이도, 박재혁, 그리고 북한 보안성 요원 리대범(박희순) 등에게 감정 이입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습니다. 이들의 감정을 이해하고 그에 동일시할 수 있어야 영화가 재미있어지는 건데 그렇지가 않은 거죠.

보통 영화에서 인물의 감정 상태는 주어진 상황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드러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들 셋은 같은 인물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똑같이 뻔하고 단순한 반응을 보일 뿐입니다. 화가 나면 소리를 지르거나 부하를 때립니다. 답답하거나 고민거리가 생기면 담배를 물고, 뭔가를 생각할 때에는 진지한 표정으로 무게를 잡지요. 이런 식의 단순한 반응만 반복할 뿐 진짜 속내는 안 보여 주니, 이들의 심리와 감정 상태에 관객이 감정 이입할 여지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김광일의 엽기적인 범죄 행각을 묘사하는 방식도 문제입니다. 영화에서 악당의 잔인한 범죄 행위를 굳이 보여 주는 이유는 관객을 감정적으로 격분시켜 ‘저 자식은 꼭 잡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데 있습니다. 그러면서 관객은 자연스럽게 영화에 몰입하게 되지요. 한국 영화 중에서는 <추격자>나 <베테랑> 같은 영화가 이런 전략을 잘 사용한 예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의 잔인한 장면들은 전혀 그런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피해자들은 그저 김광일의 먹잇감이자 노리개일 뿐 관객이 안쓰러워할 만한 ‘인물’이 아닙니다. 대부분 살해당한 고깃덩어리로서 전시될 뿐이어서 불쾌함 외에는 다른 감정을 느낄 수가 없지요. 피해자가 쫓기며 달아나는 모습이나, 김광일 패거리가 구체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과정을 짧고 임팩트 있게 보여 주는 편이 훨씬 나았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지금처럼 역겨운 장면들을 길게 보여 주지 않아도 되었겠죠. 또한 이것이 피해자를 하나의 ‘인물’로서 다루는 정당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필요 이상으로 길게 이어지는 대사 씬들 역시 문제입니다. 한두 번만 대사를 주고받으면 되는 상황임에도, 꼭 서너 번씩 더 주고받게 하면서 이야기의 흐름을 종종 끊어 먹습니다. 감독은 대사로 너무 많은 것을 해결하려 합니다. 현재 관건이 되는 문제 외에,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 인물의 과거사나 배경 설명을 늘어놓거나, 뭔가 유행이 될 만한 괜찮은 대사 몇 줄을 집어넣으면서 시간을 허비하기 일쑤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연히 관객의 집중력과 흥미는 떨어지게 돼 있습니다. 화면으로 보여야 할 것과 대사로 처리할 부분을 적절히 구분하고, 인물들 간에 간결하고 인상적인 의사소통이 이뤄지도록 더욱 신경을 썼어야 했습니다.

좋은 대중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각본을 쓴 다음 그것에 맞게 촬영하고 편집하기만 하면 뚝딱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관객에게 정확하게 전달하고 쾌감을 선사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표현 방법의 효과를 예측하고 계산해야 합니다. 새로운 방법을 고안하고 잘못된 습관은 과감히 버릴 줄도 알아야 하죠.

위에서 지적한, 캐릭터와 관객 사이에 감정적 연계가 잘 안 된다거나 대화 장면이 불필요하게 늘어지는 문제는 감독의 전작인 <신세계>나 <대호>에서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나마 <신세계>는 황정민의 연기가 다른 여러 가지 단점을 덮어 줄 정도로 뛰어났기 때문에 흥행이 된 경우였고, <대호>는 연말에 개봉했음에도 관객들의 호감을 얻지 못한 채 손익분기점에 크게 못 미치는 성적표를 받아 들어야 했습니다.

<브이아이피>는 감독의 연출 방식이 지닌 문제점들이 개선되지 않고 더 분명하게 잘 드러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실패를 극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고, 그저 화제성 있는 소재와 자극적인 묘사에 기대 흥행을 노리는 게으른 태도로 제작에 임한 것은 아니었나 싶을 정도죠. 안타깝게도 이 영화는 배우와 스태프들의 노력과 자원이 아쉽게 낭비된, 또 하나의 안 좋은 사례로 남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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