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 4. 5. 개봉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일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기치 못한 사고로 어이없게 떠나 보낼 때의 상실감도 크지만, 불치의 병으로 죽어가는 모습을 속절없이 지켜 볼 수밖에 없는 고통은 오랫동안 마음의 상처로 남습니다.
이 영화 <어느날>은 아내와 사별한 지 불과 며칠 밖에 지나지 않은 보험 조사원이 새로운 사건을 맡으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보험회사 과장 강수(김남길)는 교통사고를 당해 식물인간 상태인 미소(천우희)의 사건을 맡게 됩니다.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이었던 그녀는 부모 없이 복지원에 맡겨저서 자라난 처지로, 그녀의 법정 대리인인 복지원 직원 호정(박희본)은 합의를 무조건 거부합니다.
그런데 강수의 눈 앞에 자신이 미소라고 주장하는 여성이 자꾸만 나타납니다. 그녀는 미소의 영혼으로서, 생전 처음 세상을 자기 눈으로 볼 수 있게 됐다는 사실이 기쁘지만 병원 내부를 돌아다니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 그녀를 알아 보는 사람도 없고 감촉을 느낄 수도 없기 때문이죠. 강수가 자신을 볼 수 있다는 데 고무된 그녀는 여러가지 부탁을 되고, 강수가 그것을 들어 주는 과정에서 두 사람은 차츰 교감을 나누게 됩니다.
전체적으로 크게 어색한 부분은 없습니다. 주인공 강수가 처한 외부적 갈등 상황을 제시하고,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을 따라가면서 생기는 일들을 보여 주기 때문에, 쉽게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습니다. 또한 점차 서로에 대해 알아가며 특별한 감정을 쌓게 되는 강수와 미소의 에피소드들은 언젠가는 헤어질 수밖에 없는 그들의 운명과 맞물려 안타까운 느낌을 자아냅니다.
하지만 강수의 아내가 죽게 된 이유처럼 의도적으로 숨겨 놓고 가는 정보들, 그리고 미소와 호정의 관계처럼 각색이나 편집 과정에서 중간 부분이 사라지는 바람에 설정만 앙상하게 남은 장면들 때문에 재미가 반감됩니다. 전체적으로 빈틈없이 정교하게 잘 짜였다기보다는 군데군데 빈 곳은 있지만 그럭저럭 보는 데 무리가 없는 정도입니다.
아쉬운 각본과 연출의 빈틈을 훌륭하게 잘 메운 것은 김남길과 천우희의 연기입니다. 아내를 잃은 남자의 복잡한 심리 상태를 자연스럽게 표현해 낸 김남길의 연기는 감정적 호소력이 뛰어나서, 영화가 인물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 부분들도 어느 정도 짐작하고 넘어갈 수 있는 여지를 줍니다.
특히 솔직하고 사랑스러운 매력이 돋보이는 천우희는 보석처럼 빛납니다. 다소 어색하고 상투적인 설정들마저도 그녀가 연기하면 진정성 있는 장면으로 바뀝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영화에 대한 비판적인 생각은 쑥 들어가 버리고, 진심어린 감탄을 내뱉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영화의 진짜 주제는 결말부에 등장합니다. 환자가 추하게 죽어가지 않아도 될 권리로서 ‘존엄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그것입니다. 그 내용은 개인적으로도 동의하는 것이지만,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주제를 다루는 방식입니다.
비슷한 주제를 다룬 여타 영화들과 다른 접근 방법을 택한 것은 나쁘지 않았지만, 보편적인 상식에 기초한 설득력을 갖추지 못한 것은 문제입니다. 보통은 막다른 상황에 처한 환자나 보호자의 고통을 충분히 보여 줌으로써, 머리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지만 심정적으로는 동의할 수 밖에 없다는 식으로 관객을 설득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정반대의 길을 갑니다. 엔딩을 장식하는 강수의 결정은 머리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지만, 정서적으로 완벽하게 동의하기 힘듭니다. 얼마든지 다른 대안을 찾을 수 있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결함을 가리기 위해 강수의 안타까운 과거를 비롯하여, 감정을 자극하는 몇몇 장면들을 넣었지만 큰 효과를 거두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결말을 짓고 싶었다면, 강수가 가슴 속에 묻어 둔 상처가 어떤 것인지 초반부터 관객에게 알려 줬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그렇게 떠나 보낸 것이 얼마나 큰 상처를 남기는 일인지 차분하게 곱씹을 수 있는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줄 수 있었을 테니까요. 그랬다면 적어도 지금처럼 결말이 설득력 없어 보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