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 怒り(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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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가박스(주)플러스엠

2017. 3. 30. 개봉

며칠 전, 인천의 모 아파트에서 고등학교를 자퇴한 17세 여성이 초등학교 2학년 여자 아이를 유인해 끔찍하게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여러모로 일반인의 상식을 뛰어넘는 사건이라 많은 이들이 충격을 받았죠. 특히 비슷한 나이 또래의 아이가 있는 부모들은 더욱 그랬습니다. 이 사건에 대한 기사를 읽고 피해 아동과 같은 나이의 딸에게 제가 한 말은 ‘낯선 사람을 조심해’였습니다.

이 영화 <분노> 역시 낯선 사람, 즉 피해자와 아무 연고가 없는 가해자에 의한 살인 사건이 전면에 등장하는 영화입니다. 한여름의 폭염 속의 피로 얼룩진 사건 현장을 수사하던 경찰은 방 한 쪽에서 피로 쓴 ‘怒(노)’라는 글자를 발견합니다. 현장의 지문과 CCTV의 인상착의를 바탕으로 전국에 수배령이 내려지지만 좀처럼 범인의 행적을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 뒤 1년의 시간이 흐른 여름, 치바의 항구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둔 아이코(미야자키 아오이), 도쿄의 돈 잘 버는 회사원이자 동성애자인 유마(츠마부키 사토시), 엄마와 함께 오키나와의 작은 섬으로 이사온 이즈미(히로세 스즈)는 각각 낯선 남자와 만나 친해지는 경험을 합니다.

아이코는 아버지와 함께 일하는 타시로(마츠야마 켄이치)를, 유마는 클럽에서 만난 나오토(아야노 고)를, 그리고 이즈미는 무인도에서 마주친 배낭여행자 타나카(모리야마 미라이)와 만나게 됩니다. 영화는 묘하게 서로 닮았고, 지명수배 용의자와 인상착의가 비슷한 이들 세 사람의 운명을 찬찬히 따라갑니다.

끔찍한 살인사건으로 시작하는 전형적인 미스터리의 방식을 따르고 있지만, 이 영화엔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분투하는 수사관의 존재감이 미약합니다. 대신 여기서 진정한 수사관 역할을 하는 것은 관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셋 중 누가 범인일지 궁금해 하며 긴장감 속에서 장면들을 보게 되니까요. 각기 다른 지역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번갈아 가며 나오지만, 영화에 쉽게 몰입할 수 있는 이유도 범인을 찾는다는 목표가 설정돼 있기 때문입니다.

낯선 세 남자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야기들은 사실 특별하게 새로운 것은 아닐 것입니다. 지금껏 숱한 영화나 소설에서 여러 번 다루었던 소재이고, 여기에서 언급되는 일본의 사회 문제들도 이미 잘 알려진 것들입니다. 하지만 그런 익숙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해석에 대한 부담없이 이 영화의 주제인 ‘인간에 대한 믿음의 문제’를 깊이 성찰할 수 있는 기회가 생깁니다.

원작자 요시다 슈이치는 <퍼레이드><파크 라이프><악인> 등의 작품으로 국내에도 많은 팬을 가진 소설가입니다. 인물의 내면을 깊이 파고 드는 묘사, 도쿄와 지방의 격차에 대한 문제 의식, 다양한 인물들의 삶을 엮어내는 솜씨로 유명하지요. <분노> 역시 그런 작가의 특징이 아주 잘 살아 있는 작품입니다.(국내에는 2015년에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이상일 감독은 일본에서 활동하는 재일교포 3세로서 <69 식스티 나인> <훌라 걸스>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감독입니다. 요시다 슈이치 원작의 <악인>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던 그는, 또 한 번 같은 작가의 소설을 영화화하는데 도전했습니다.

전반적으로 소설의 내용을 2시간 20분이라는 한정된 시간에 담아내기 위해, 상황 설명을 적절히 생략하고 인물의 감정 상태에 보다 집중하는 연출이 돋보입니다. 또한 서로 다른 지역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도록 설정된 장면 전환 방식과, ‘이 자가 범인일지 모른다’는 의심을 끊임없이 불러 일으키도록 고안된 샷 구성과 편집을 통해 끝까지 극의 긴장감을 유지하는 데 성공합니다.

프로듀서 가와무라 겐키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는 <고백> <악인> 같은 소설 원작 영화에서부터 <괴물의 아이> <너의 이름은.> 같은 애니메이션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스펙트럼의 작품을 제작해 온, 명실상부한 일본 최고의 제작자로 손꼽히는 인물입니다.

특히 감독의 크리에이티브를 조율하여 기존 일본 영화 특유의 ‘지역성’을 덜어내고 세계 시장에 통할 만한 ‘보편성’을 갖추게 하는 능력이 뛰어납니다. 그가 제작한 영화들은 일본에서만 통하는 정서가 덜하고, 다른 나라 사람들도 충분히 공감할 만한 요소가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번 영화에서도 감독이 어떤 설정과 샷을 강조하고 덜어낼 것인지, 음악과 사운드 활용은 어떻게 할 것인지를 판단하는 데 있어서 제작자만이 할 수 있는 조언을 잘 해 준 것 같습니다.

평소 일본 드라마나 영화를 자주 보는 관객이라면, 일본 대표 배우들이 총출동하는 이 영화가 매우 반가울 것입니다. 이미 일반 영화 팬들에게도 익숙한 츠마부키 사토시나 미야자키 아오이, 와타나베 켄 외에 <데스 노트> 시리즈의 마츠야마 켄이치, <최고의 이혼> 등의 드라마로 잘 알려진 아야노 고, <모테키>의 모리야마 미라이,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신예 히로세 스즈 등이 그야말로 열연을 펼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삶에 들어온 낯선 사람을 믿어야 할지, 믿지 말아야 할지를 판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요즘처럼 세대 간의 불신, 계층 간의 갈등, 상대 성(性)에 대한 그릇된 혐오를 조장하는 행태가 부각되는 시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새로 만난 사람이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해 줄 단 하나뿐인 사람인지, 아니면 크게 해꼬지 하고 떠나 버릴 나쁜 놈인지 점점 가늠하기 어려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 영화 <분노>는 낯선 세 남자와 관계를 맺게 되는 중심 인물들의 운명을 통해, 타인에 대한 판단을 내리기 앞서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잘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주관적으로 왜곡해서 받아들일 때 비극의 씨앗은 뿌려집니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고 자신이 가진 약점을 실제보다 크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존감이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겉으로 아무리 번듯하고 잘 나가는 것처럼 보여도 마음 한 구석에는 스스로를 부끄러워 하는 마음이 남아 있습니다. 이런 경우 다른 사람에 대한 의심이 자라납니다. 상대는 별 생각없이 잘해 준 것인데도, ‘나 같은 사람에게 잘해 주는 걸 보니 뭔가 다른 속셈이 있을거야’ 하는 식으로 생각하는 거죠.

반대로 자신이 실제보다 더 매력 있고 능력도 출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남에게 쉽게 속아 넘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의 부풀려진 자존감과 자만심이 ’내가 어느 정도 수준은 되니까, 이런 대접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만들죠. 그렇게 되면 상대의 진짜 모습이나 숨겨진 의도를 알아 보려는 노력을 소홀히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 관계에 있어서 실수는 누구나 합니다. 기계가 아닌 이상 남에 대한 평가를 늘 정확하게 할 수도 없습니다. 특히 아직 미성숙한 어린이들이나, 신체적으로는 완전히 성숙했지만 마음은 덜 자란 청소년들에게는 잘못된 판단이 치명적인 결과로 돌아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 ‘낯선 사람을 가능한 피하라’는 조언은 그들에게 꼭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을 만나는 데 있어서 실패의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정말 괜찮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을 완전히 날려 버리게 됩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혼자만의 세계에서 살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실수를 저지르느니 아예 그럴 가능성을 차단하겠다’는 것보다는, 부족하더라도 ‘스스로의 모습을 돌이켜보고 끊임없이 고쳐 나가겠다’는 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옥석을 고르려는 노력을 꾸준히 해 나가다 보면, 보다 나은 결실을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 곁에 있는 가장 소중한 사람들도 처음에는 다 ‘낯선 자들’이었다는 것, 잊지 말아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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