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과 출신입니다만 – 가와무라 겐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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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즈베리

<문과 출신입니다만>, 가와무라 겐키 지음, 이인호 옮김, 와이즈베리 펴냄 (2017. 3. 1.)

이 책을 쓴 가와무라 겐키는 현재 일본에서 가장 각광받는 영화 프로듀서입니다. 79년생으로 젊은 축에 속하는 그는 일본의 메이저 제작사인 도호 영화사 소속으로 수많은 영화 제작에 참여해 왔습니다. <고백>, <악인> 같은 극영화부터, 얼마전 우리나라에도 개봉되어 인기를 끈 <너의 이름은.> 같은 애니메이션까지 언제나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찬사를 받는 수준급의 작품을 만드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영화화된 첫 소설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이 140만부나 팔리면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기도 한 그이지만, 수학과 과학을 싫어해서 도망치듯 문과로 진학해야 했던 학창 시절의 경험에서 비롯된, 이과 콤플렉스는 떨칠 수 없었나 봅니다.

스티브 잡스, 빌 게이츠, 마크 저커버그 같은 이과 출신 사람들이 세계적인 트렌드를 이끌고 있는 것을 보고 자극 받은 그는, 2년간 일본의 이과 출신 유명 인사 15명을 찾아가 대화하고 가르침을 구하였습니다.

저자가 만나 대담을 나눈 사람들은 암흑 물질을 연구하는 이론 물리학자부터 인터넷과 뉴미디어 업계의 선두 주자들, AI와 로봇 연구자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채롭습니다. 이공계 대학을 나왔지만 영화 일을 하고 있고, 또한 과학기술 쪽에 딱히 관심도 없는 저로서는 생판 모르는 애기만 나오는 거 아닌가 하는 걱정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상대와의 공통점을 찾아 내어 격의 없는 자세로 이야기를 끌어가면서도 핵심을 뽑아내는 저자의 대화법 덕분에 어렵지 않게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지식과 트렌드의 최전선에 있는 이들이 과거에 했던 노력과 현재 모습, 그들이 전망하는 미래상에 대한 이야기가 무척 흥미롭습니다. 대담 꼭지마다 솔직한 후기를 덧붙이고, 저자가 대담자에게 받은 가르침을 요약 정리해 두어 이해가 편합니다.

이 책을 보고 느낀 것은 역시 각 분야의 최전선에 있는 사람들은 전공을 막론하고 모두가 발견자이자 창조자라는 사실입니다. 무엇이든 꿈을 꾸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충분한 시간을 들여 연구하고 숙고하는 과정을 거쳐, 괄목할만한 성과를 내는 패턴은 영화 프로듀서인 저자이든 이과의 유명인들이든 마찬가지였습니다. 다만, 접근하는 방식이 달랐을 뿐입니다. 저자 역시 머리말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처음에 나는 이과와 문과의 차이를 알려고 했다. 문과에 있고 이과에 없는 것. 이과에 있고 문과에 없는 것. 그 차이를 통해 각각이 해야 할 일을 찾아내려 한 것이다. 그러던 중에 깨닫기 시작했다. ‘이과와 문과는 똑같은 산을 다른 길로 오르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인간은 무엇을 아름답다고 느끼는가?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가? 문과인이 정치와 경제, 말과 문장을 통해 오르는 ‘산’이 있다. 똑같은 ‘산’을 이과인은 수학과 공학, 의학과 생물학을 이용해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찾아낸 ‘길’은 예상을 아득히 초월할 만한 창조성과 시사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새로운 관점이 생기고 시야가 넓어졌다.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과, 세계가 앞으로 향해햐 하는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과인 또한 같은 산의 정상을 향해 나아가는 동료로서 문과인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p.5에서 인용)

고교 시절 대학 진학과 관련해 문과와 이과로 교육과정을 나누는 나라는 전세계에서 일본과 우리나라 밖에 없습니다. 식민지 시절에 이식된 근대 교육 체제의 잔재죠. 2018년부터 통합 과학과 통합 사회 교과를 만들어 문-이과 구분을 없애겠다는 정부 발표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마다 타고난 성향, 그리고 성장 과정에서 경험한 것들에 따라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에 분명한 차이를 보이는 것은 사실입니다. 또한 고등교육기관인 대학 및 대학원 교육의 변화 없이 중등 교육에만 변화를 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의문입니다. 창의-융합 인재 양성이란 간판을 내걸고는 있지만, 심화되는 자연계 기피 현상으로 노동시장 인력 구조에 쏠림 현상이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한 방편은 아닌지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문-이과 구분보다는 실제 자신의 적성에 따라 진지하게 진로를 결정할 수 없게 만드는 현실이 더 문제입니다. 단지 대학에서 많이 뽑는다니까, 수학, 물리 같은 특정 교과목이 싫어서, 나중에 취직이 잘 되고 돈을 많이 번다니까 선택하게 되면 분명히 문제가 생깁니다. 많은 사람들이 대학에 진학한 후 적성에 안 맞아 겉돌거나, 자신의 능력에 대한 부정적인 낙인 효과 때문에 자존감이 떨어지는 경험을 하는 이유가 여기있습니다.

취직 안되는 문과라서 죄송할 이유도 없고, 인간 관계나 사회 생활을 단순하게 생각하는 이과라서 놀림받을 이유도 없습니다. 서로의 문제를 지적하는 심리 속에는 ‘나는 그렇지 않으니 괜찮다’는 식의 자기 위안이 들어 있지요. 문과냐 이과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목표를 설정하고 살아 가느냐입니다.

저자를 포함하여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보면, 모두 자기의 분야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고 개척하여 사회 발전에 이바지하고 인류에 기여하고 싶어 합니다. 그에 비하면 우리나라의 이른바 ‘엘리트’들은 어떤가요. 삶의 목표를 자기 자신과 가족이 취할 이득에만 두고, 지역 사회나 국가, 인류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일본의 발전된 과학 기술 역량 등을 고려할 때, 4차 산업 혁명을 대비한 창의-융합 인재가 나오지 않는다고 문-이과를 없애고 통합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삶의 목표가 똑바로 잡혀 있지 않는데, 거기까지 올라가는 기술을 아무리 잘 가르쳐 봐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일본의 문과 인재가 이과의 인재들을 만나 이야기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뼈저리게 느낀 것은 바로 이런 문제 의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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