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슬로운 Miss Sloan (2016)

MSL_P
©(주)메인타이틀 픽쳐스

2017. 3. 29. 개봉

사회 생활을 하다 보면 자신의 신념에 반하는 일을 하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자신이 속한 회사나 조직의 이익을 위해 동원되어, 잘못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쁜 짓에 동참하는 경우처럼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장 먹고 살 것을 걱정해서든, 아니면 단순히 분위기를 깨지 않기 위해서든 적당히 자기 소신을 감추면서 살아갑니다.

이 영화 <미스 슬로운>은 신념에 반하는 일을 해야 할 처지에 놓인 여성 로비스트의 선택을 다룹니다. 미국 워싱턴 정가에서 가장 유능한 로비스트 중 하나인 엘리자베스 슬로운(제시카 차스테인)은, 보수파 상원의원으로부터 총기 규제 법안 저지 캠페인에 합류할 것을 제의받습니다. 그는 총기를 휴대하는 것에 우호적이지 않은 대다수 여성 유권자들을 설득할 수 있는 새로운 프레임도 제안합니다.

하지만 슬로운은 그런 계획에 도움을 줄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습니다. 자신의 평소 신념에 반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상원의원의 면전에 대고 크게 비웃어 주는 것으로 자신의 기분을 표현합니다. 하지만 그녀가 몸 담고 있는 로비 전문 회사의 경영진은 무조건 이 건을 맡으라고 압력을 가합니다.

그런 와중에 총기 규제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애쓰고 있는 반대편 회사의 대표 로돌포 슈미트(마크 스트롱)가 찾아오지요. 그는 자기 쪽으로 합류해 줄 것을 청합니다. 슬로운은 고심 끝에 10여년 간 몸 담았던 업계 일류 회사를 박차고 나와, 자기 신념에 맞는 일을 하기 위해 모든 것을 내걸고 싸움을 시작합니다.

정치의 세계를 다룬 대다수의 할리우드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여성 캐릭터가 할 수 있는 역할은 늘 제한적이었습니다. <스테이트 오브 플레이>(2009)나 <킹메이커>(2011) 같은 빼어난 정치 스릴러물들에서도, 여성은 비리를 파헤치는 주인공의 조력자 역할 또는 스캔들로 발전하는 사건의 희생양이 되는 데 그치곤 했습니다.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에서 로빈 라이트가 연기했던 클레어 같은 독립적인 캐릭터는 진짜 예외적인 경우죠.

이 영화의 주인공 엘리자베스 슬로운은 확실히 다릅니다. 남자들이 판치는 입법 로비의 현장에서 누구보다도 뛰어난 능력과 카리스마로 어려움을 헤쳐 나갑니다. 마치 갱스터물이나 기업 극화에 나오는, 냉철한 판단과 과감한 행동으로 조직을 구해 내는 남성 보스들 같습니다. <대통령의 연인>(1995)에서 아네트 베닝이 맡았던, 홀아비 대통령과 연애까지 하는 말랑말랑한 이상주의자 로비스트와는 180도 다른 인물이죠.

제시카 차스테인의 연기는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납니다. 아주 단순한 얼굴 표정 하나만으로도 인물의 카리스마를 제대로 만들어 내거든요. 스크린에 등장할 때마다 시선을 강탈하는 수준이라 다른 배우들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을 정도입니다. 남들 앞에서는 절대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슬로운의 사회적 자아 뿐만 아니라, 약육강식의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해 각성제를 달고 살고, 어디에도 마음 붙일 데 없는 고달픔을 감수해야 하는 개인적 자아의 모습까지 섬세하게 잘 표현하면서 그야말로 최고의 인생 연기를 보여 주었습니다.

에스미 역을 맡은 구구 음바타-로와 제인 역할의 앨리슨 필은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의 연기를 보여 줍니다. 그들의 캐릭터는 존재 자체로 여성이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싸워 가는 다양한 방식을 표상합니다. 주인공 슬로운의 반면 교사가 되기도 하고 조력자가 되기도 하면서 전체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이끌어 가지요. 이런 면에서 <미스 슬로운>은 여성 캐릭터들이 중심이 된 상업적인 정치 스릴러가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준 모범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릴러로서의 긴장감을 끝까지 유지하면서도 잘 준비된 반전이 인상적인 이 영화의 시나리오는 신인 각본가 조너선 페레라의 데뷔작입니다. 중심 소재인 총기 규제 법안을 둘러싼 논점들을 플롯에 잘 녹여 내었고, 오직 승리만을 원하는 슬로운의 방식에 대한 문제 의식을 활용하여 반전의 효과를 높인 것이 탁월한 부분입니다.

그에 비하면 <셰익스피어 인 러브>로 잘 알려진 감독 존 매든의 연출은 좀 무난한 편입니다. 특별하게 튀는 부분도, 모자라는 부분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야기 속 슬로운의 심리 상태를 적절하게 반영하는 편집 리듬만큼은 볼 만합니다. 초중반까지는 신경이 곤두서 있는 주인공의 모습을 연상시키듯 빠른 편집으로 내달리다가, 후반으로 갈수록 주인공의 깊어지는 고민과 갈등에 맞춰 컷의 길이를 길게 가져 가는 식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시류에 따라 자기 소신을 굽힐 줄 알고 유연하게 행동하는 것이 정치가가 갖춰야 할 자질이라고요. 이런 사람들에게는 소속 정당의 이득을 위해, 혹은 선거에서 당선되기 위해 개인적인 소신과 배치되는 발언이나 행동을 하는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닌 일이 됩니다.

하지만 정치는 자기가 가진 소신과 비전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그것을 통해 유권자의 선택을 받는 과정입니다. 아무런 신념도 없이 정세의 유불리에 따라 입장을 바꾸는 정치인에게 미래를 맡길 국민은 없습니다. 그래서 정치가로 성장하려면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가운데 그것을 꾸준히 설득하는 작업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무 준비와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언젠가는 옳은 일이 보상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게으른 낙관’이 바로 그것입니다. 정의의 편에 서는 것, 스스로의 도덕적 당위와 ‘선의’를 확신하는 것만으로는 유권자를 설득할 수 없습니다.

지난 2007년과 2012년 대선에서 진보 진영이 정권을 되찾지 못했던 이유 중 하나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명박의 BBK 관련 사항, 박근혜를 돕기 위한 국정원 선거 개입 사건 등 상대의 명백한 범죄 행위를 공론화시키기만 하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잘못을 들추고 지적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이것을 폭로하면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예상하고 그 이후의 계획까지 세워 두었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던 거죠.

이 영화 <미스 슬로운>은 총기 규제 법안의 입법 로비 과정을 통해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아주 잘 보여 줍니다. 우리는 체계적인 계획을 짜고, 그것을 주도면밀하게 실행에 옮기며,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상대편의 대응에 맞설 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희생도 따릅니다. 엘리자베스 슬로운처럼 기존에 맺었던 인간 관계가 모두 끊어질 수도 있고 개인의 경력을 망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것이 개인의 안위를 신경쓰지 않아도 될 만큼 중요한 가치라면 충분히 헌신해 볼 만하지 않을까요? 다가올 대선에서, 대통령을 탄핵한 대다수 국민들의 바람을 제대로 받들기 위해서는 비둘기 같이 순결한 마음과 뱀 같은 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대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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