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빙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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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엔터테인먼트

2017. 3. 1. 개봉

2003년에 개봉한 박신양, 전지현 주연의 <4인용 식탁>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심리극이었습니다. 호러의 외양을 띠고 주인공들의 트라우마를 되짚어 올라가는 이 작품은, 단기간에 급성장한 한국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들춰내며 우리 자신의 모습을 뒤돌아보게 만들었지요.

이 영화 <해빙>은 <4인용 식탁>으로 데뷔했던 이수연 감독이 14년의 시간을 건너 뛴 후 내놓은 두 번째 장편 영화입니다. 서울 강남에서 개인 병원을 차렸지만 망하고 이혼까지 당한 내과 의사 승훈(조진웅)은 신도시로 개발되는 경기도 외곽으로 내려가 선배의 내과 병원에서 월급쟁이 의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꽤나 의식하는 간호사 미연(이청아)과 함께 주로 내시경 환자를 보던 그는, 자기가 세 들어 살고 있는 건물주(김대명)의 늙은 아버지(신구)를 환자로 맞게 됩니다. 그런데 이 노인이 마취 상태에서 아주 깜짝 놀랄 만한 고백을 합니다. 자기가 토막 살인을 하고 시체를 내다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 때부터 승훈은 건물 1층에서 정육점 식당을 하는 건물주 부자를 경계하며 의심하게 되는데, 점차 모든 것이 자신의 의심과 딱 맞아 떨어진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영화의 중심 갈등 요소는 감독의 데뷔작과 마찬가지로 현실에서 나옵니다. 경제적 성공을 추구하다 삶의 궤도에서 이탈한 승훈의 황폐한 마음밭과, 지방 토박이들인 건물주 부자나 간호사 미연 같은 인물의 생리는 신도시 개발 지역이라는 공간을 매개로 충돌하고 파열음을 일으킵니다.

이것을 표현하는 감독의 연출력은 매우 좋은 편입니다. 등장인물의 심리에 의해 뒤틀린 현실을 호러 효과를 동원해서 보여 주고, 폐소 공포증을 일으킬 정도로 상황을 답답하게 옥죄면서 지속적으로 궁금증을 유발하며, 적절한 반전과 앞뒤가 맞는 설명을 제공하여 꽤 완성도 높은 미스터리 스릴러를 만들어 냈습니다.

다만, 중반 이후까지 겉으로 드러나는 사건은 별로 없고 주인공의 심리 묘사와 내면에서 벌어지는 혼란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관객의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또한 미스터리의 해답을 ‘누가 죽였는가’에만 국한해서 찾는 경우라면 이 영화에는 선택지가 별로 없기 때문에 결론을 내는 방식이 그다지 흥미롭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이 좀 더 중요합니다.)

주연을 맡은 조진웅은 마치 연기 쇼케이스라도 하듯 자신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얼굴들을 자신있게 선보입니다. 도시 생활만 했을 것 같은 샌님에서 무뚝뚝한 꼰대로, 또 혼란에 빠져 허우적대는 인텔리에서 무뚝뚝하고 공격적인 수컷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순간 순간 표변하는 그의 연기력은 관객들을 충분히 사로잡을 만합니다.

그와 함께 호흡을 맞춘 김대명과 이청아의 현실감 넘치는 연기도 아주 좋은 편입니다. 드라마 <미생>으로 인지도를 높인 후에도 꾸준히 여러 영화에 출연하며 연기 스펙트럼을 넓혀 온 김대명은, <내부자들>에서 보여 줬던 느물거리는 기자 역할과 <특종: 량첸 살인기>에서 선보인 뻔뻔한 살인마 역할을 섞어 놓은 듯한 톤으로 지방 도시 정육점 주인의 모습을 생생하게 재현하였습니다.

영화에서 연기력을 보여 줄 만한 기회가 별로 없었던 이청아 또한 기대 이상의 안정된 모습을 보여 줍니다. 실제 동네 의원에 가면 맞닥뜨릴 것 같은, 어리지만 영악한 간호 조무사의 일상적인 모습을 아주 자연스럽게 연기해냅니다. 그녀의 말투와 표정, 몸짓은 아주 현실적이어서, 다소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 있는 이 영화 속의 세계를 허공에 붕 뜨게 하지 않고 잡아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 작품에서 감독이 주목하는 것은 서울이란 공간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회 경제적 성공을 위한 폭주와, 그 외의 지방에 여전히 상존하는 은밀하고 뿌리 깊은 법의 사각지대입니다. 그 사이에서 ‘전락해 버린 중산층’의 서글픈 모습을 포착하려 노력하지요.

그런데 영화의 이런 주제 의식은 10년쯤 전이었다면 몰라도, 중산층이 무너지고 상위 1%에게 갈수록 부와 권력이 집중되는 양극화 사회로 변한 2017년의 현실에서는 보편적인 공감을 얻기 힘들어 보입니다. 이미 대다수의 일반 대중들, 특히 젊은 층들은 중산층은 커녕 더이상 잃을 것이 없는 처지로 내몰리고 있는 실정이니까요.

아무리 의사가 빚을 지고 지방의원 월급쟁이 의사로 일한다 하더라도 연봉은 보통 1억이 넘습니다. 게다가 영화 속 설정처럼 환자가 많은 병원이라면 더 많을 수도 있지요. 감독의 의도와는 달리 승훈은 중산층에서 탈락한 사람이 아니라 여전히 소득 상위 1%에 가까운 초고소득자인 것입니다.

이렇게 공감하기 어려운 주인공은 장르적 재미를 결정적으로 반감시킵니다. 이 영화 속 여러 장치들과 암시, 그리고 결말부의 반전은 주인공에 대한 감정 이입을 전제로 했을 때에나 효과적인 것들이니까요. 승훈의 감정에 몰입하는 대신 그에게 벌어지는 일들을 보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따져 보게 되면, 감독이 깔아 놓은 복선과 반전을 미리 알아채기란 아주 쉬운 일이 돼 버립니다.

<해빙>은 감독의 장르에 대한 이해도와 연출력, 배우의 열연 등 여러가지 미덕이 있지만 대중들의 이해와 호감을 사지는 못할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이것은 대중의 취향이 한 쪽으로 쏠려 있거나 수준이 낮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영화의 기획 자체가 한국 사회의 너무 빠른 몰락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가장 아쉽고 서글픈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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