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2. 22. 개봉
흑인 영화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것은 스파이크 리의 <똑바로 살아라>(1989)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대 흑인 젊은이들의 내재한 분노가 폭발하는 지점을 잘 포착한 이 작품은, 3년 후에 발생한 LA 폭동을 예견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지요.
이후에 나온 존 싱글턴의 <보이즈 앤 후드>(1991) 역시 흑인문제를 방치하는 사회에 대한 비판과 흑인 청년들의 각성을 담아내어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저예산으로 만들어진 이들 두 작품의 상업적 성공은 이후 다양한 장르의 흑인 영화들이 등장할 수 있는 길을 닦아 놓았습니다.
이 영화 <문라이트>는 어느 흑인 소년의 가혹한 성장기와 그를 버티게 해 준 사랑에 관한 작품입니다. ‘리틀’이란 별명으로 불리는 샤이론은 마약 중독자 어머니(나오미 해리스)와 단둘이 살며 방치된 채 자라고 있습니다. 친구들에게 집단 괴롭힘을 당하며 악몽 같은 일상을 보내는 그에게 힘이 되어 준 것은, 사려 깊고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마약상 후안(메어샬라 알리)과 그의 여자친구 테레사(자넬 모네), 그리고 동갑내기 친구 케빈입니다.
샤이론의 어린 시절, 십대, 청년기를 세 단락으로 구분하여 차분하게 그의 삶을 따라가는 이 작품의 미덕은 무엇보다 차분하게 내면의 풍경을 묘사할 줄 안다는 점입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수줍고 과묵한 샤이론의 마음은 영화가 진행되면서 하나씩 베일을 벗고 진정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 영화의 에피소드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의 플롯으로 엮기 힘들어 보입니다. 서로 연관성 없이 툭툭 끊길 때가 많고, 느닷없는 전개가 이어지기도 하며, 단락까지 구분되어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 영화 속의 모든 장면들이 표현하고자 한 것은 주인공 샤이론의 상처 입은 내면이 어떤 과정을 거쳐 변화를 겪고 성장하게 되는가, 더 나아가 어떻게 자신의 성정체성을 깨닫고 사랑을 나누게 되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각본이 매우 탄탄하게 잘 씌어져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무 연관성 없어 보였던 장면과 대사들도 중, 후반부가 전개된 이후 다시 떠올려 보면, 치밀하게 배치된 복선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영화가 <라라랜드>와 함께 올해 아카데미 각본상의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배우들의 연기가 전반적으로 좋은 편인데, 인물의 섬세한 디테일과 감정 표현을 놓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007 스카이폴>로 낯익은 나오미 해리스와 이 영화로 올해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의 유력한 후보로 떠오른 나왔던 메어샬라 알리, 팝 아티스트 자넬 모네를 빼면 모두 신인급에 가까운 배우들인데도 그런 것을 보면, 신인감독인 배리 젠킨스의 연출력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물의 감정 상태에 따라 앵글과 카메라 워킹을 달리하는 촬영은 영화의 주제와 잘 맞물려 있습니다. 초반부의 어린 샤이론이 수영을 배우거나 케빈과 몸싸움을 하는 장면, 중반부의 폭력 장면, 그리고 후반부의 재회 장면들이 각기 다른 스타일로 찍혀진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음악과 사운드 효과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도 눈에 띕니다. 화면 속 상황에 대해 직접적인 논평을 시도할 때에는 랩 음악과 올드 팝을 깔고, 주인공 내면의 들끓는 감정이 중요할 때는 클래식 음악을 들려 주며, 의도적으로 배경음을 완전히 지운 공백 상태를 자주 집어넣어 관객의 주의를 환기시킵니다. 다소 과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나쁘지 않은 시도였습니다.
미국 흑인 하층민들 중에는 이 영화의 샤이론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처참한 일들을 겪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정말 고통스러워서 세상을 스스로 등지기도 하고,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살해당하여 삶을 완전히 빼앗기기도 하지요.
이 영화는 이전 세대의 전형적인 리얼리즘 계열 흑인 영화들처럼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떤 정신 상태나 행동 방침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지 않습니다. 힘을 길러서 누구도 자신을 넘보지 못할 만큼 강해지거나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지 말고 분노하라고 말하는 대신, 그 시기를 버텨내고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이 어디에서부터 나오는지에 주목합니다.
우리에겐 관심과 사랑을 나눌 사람이 필요합니다. 피붙이든 아니든, 나이가 많건 적건, 남자든 여자든 언제나 교감을 나누고 우리 편이 되어 줄 사람 말입니다. 그런 사람이 한 명만 있어도 우리 인생은 살 만한 것이 됩니다. <문라이트>의 미덕은 이 단순하고도 당연한 진리를 다시금 절실하게 깨닫게 만든다는 데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버틸 수 있게 도와 준 ‘그들’에게 진심어린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