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에타 Julieta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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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1. 17. 개봉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주의하세요.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내 어머니의 모든 것>(1999), <그녀에게>(2002) 같은 작품으로 국내 영화 관객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스페인 감독 중 한 명입니다. 그의 작품들은 대개 여성과 성소수자, 마약 중독자, 장애인 등 결코 사회의 주류라고 할 수는 없는 인물들이, 예상치 못한 기이한 상황에 처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언제나 직접 각본을 쓰고 연출하는 ‘작가’로서 알모도바르 감독은 보편적인 감수성에 부합하는 이야기 전개나 주제 의식에는 딱히 관심이 없습니다. 대신 현실과 동떨어진 일반 대중의 윤리나 상식에 이의를 제기하고, 그것이 일상의 개인에게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지를 탐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늘 그의 영화는 사회가 부여한 성 역할 구분의 무의미함, 염치나 체면을 차리지 않는 눈먼 사랑의 열정, 여성의 개인적인 욕망과 모성으로서의 책임감이 빚어내는 갈등 같은, 보다 생생한 삶의 현장에서 건져 올린 문제들을 가지고 씨름해 왔습니다.

이 영화 <줄리에타> 역시 감독이 즐겨 다뤄 온 인물 구도와 주제 의식을 반복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식을 향한 모성애와 여성으로서의 욕망이 충돌하는 지점에 선 주인공이 등장하고, 삼각 관계가 설정 되어 있으며, 어머니와 딸 사이의 애증을 다룬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마드리드에 사는 중년의 여성 줄리에타는, 지금은 생사도 모르는 딸 안티아의 소식을 우연히 듣게 됩니다. 성년이 되자 자기 곁을 훌쩍 떠나 버린 안티아에 대한 원망과 아픔을 간직해 온 줄리에타는, 딸에게 남기는 편지 형식의 글을 통해 젊은 시절의 이야기를 관객에게 들려 줍니다. 남편 소안과의 운명과도 같은 만남과 사랑, 안티아의 출생과 성장, 그리고 비극적인 사고에 대한 이야기를요.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인 앨리스 먼로의 단편집 <런어웨이>(2013년 국내 출간)에 수록된 연작 단편 <우연>, <머지않아>, <침묵>을 각색한 이 작품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성적 욕망과 자기 결정권을 가진 여성을 탐탁치 않게 여기는 편협한 시선과, 그것을 여성 스스로가 내면화한 자기 검열이 어떻게 주인공 줄리에타의 삶을 망치는가입니다.

젊은 시절 그녀는 철학 교사의 꿈을 가지고 기차를 타고 가던 중 아버지 뻘의 남자가 자신에게 성적 접근을 시도하자 매몰차게 거절합니다. 그런데 곧 그 남자가 돌연 자살을 하게 되고, 그것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며 괴로워합니다. 자기가 말상대라도 되어 주었더라면 자살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요.

그런 그녀를 위로해 준 것은 같은 기차에서 만난 매력적인 남성 소안입니다. 줄리에타는 직업이 어부라고 이야기하는 소탈한 이 남자와 정신적, 육체적으로 완벽하게 하나가 되는 경험을 합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식물 인간 상태의 아내가 있기 때문에, 그녀는 두 사람의 관계를 진전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합니다. 다행히 그를 다시 찾아갔을 때는 소안의 아내가 이미 세상을 떠난 상태라 갈등 상황을 피할 수 있게 되지요.

그러나 이런 과정에서 생긴 일종의 ‘죄의식’은 부정적으로 내면화하여 외부 상황을 비난하는 방식으로 표출됩니다. 그래서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혼자 돌보는 아버지가 집안일을 돕는 어린 여자와 사랑에 빠진 것에 역겨움을 느끼고, 소안이 동네 친구인 매력적인 여성 아바와도 가끔씩 잠자리를 하는 사이였다는 것에 격분합니다. 이런 감정적 동요는 사랑하는 남편을 잃는 사고를 유발함으로써 더욱 줄리에타를 옥죄어 듭니다.

이후 그녀는 속죄라도 하듯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딸 안티아를 뒷바라지 하는 일에 전념합니다. 여성으로서의 욕망을 억누르고 대신 그 자리를 모성의 의무로 채워 넣은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노력은 18세를 맞은 안티아가 집을 나가 영영 돌아오지 않게 되는 불행한 결과로 이어질 뿐입니다.

이런 지난한 과정을 거쳐 그녀가 깨닫는 것은, 행복은 자신의 주체성을 회복하고 삶의 즐거움을 자발적으로 향유하려 노력하는 데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안티아를 되찾기 위해 현재의 남자친구 마리오의 곁을 떠나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도입부와는 다르게, 단호한 표정으로 마리오와 함께 차를 타고 안티아가 있는 곳을 찾아가는 엔딩은 그런 깨달음을 담고 있습니다.

알모도바르 감독 영화 특유의 선명한 색채 대비는 줄리에타의 기울어져 가는 운명의 비극성을 한층 강화하는 역할을 합니다. 반면, 관능적으로 연출된 섹스 신들은 영화 속 대부분의 시간 동안 수동적이고 상황에 이끌려 다니기만 하는 줄리에타가 황홀하게 빛을 발하는 장면으로서, 그녀의 생명력과 의지를 강렬하게 보여 줍니다.

젊은 시절의 줄리에타 역할을 맡은 아드리아나 우가르테는 주로 스페인 TV 드라마에 출연했던 배우인데, 자부심을 가질 만한 외모와 지적 능력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좀처럼 억압의 그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줄리에타의 존재감을 또렷하게 드러냅니다. 중년의 줄리에타를 맡은 엠마 수아레즈는 스페인 영화계를 대표하는 여배우답게, 기품 있는 아름다움을 갖춘 연인으로서의 모습과 세월의 무게에 지친 어머니의 얼굴을 자연스럽게 오가는 관록을 뽐내지요.

여성이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고 당당할 때 가장 아름답고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은 요즘 같은 세상에선 상식으로 통합니다. 하지만, 그 상식대로 살기 위해서는 여전히 장애물이 많습니다. 연인으로서의 정조 관념, 어머니로서의 의무, 가족 제도에 대한 책임감 등을 통해 여성에게 씌우는, 부당한 죄의식의 멍에를 벗기 위해서는 지난한 싸움을 해야 하기 때문이죠.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 <줄리에타>가 제기하는 문제들은 과거의 것이 아닌, 현재진행형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줄리에타가 겪어야 했던 어려움들은 좀 더 단호하게 싸우지 못했던 어머니 세대의 것만이 아니라, 지금도 좌절과 싸우며 힘들게 분투하고 있는 수많은 여성들의 것이기도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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