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려진 시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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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1. 16. 개봉

판타지나 SF물은 일상 세계와는 다른 자연 법칙이나 사회 원리가 통용되는 상황을 가정하고, 그것 때문에 생긴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분투하는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반지의 제왕>은 상상의 시공간인 ‘중간계’의 위기에 관한 이야기이고, <인터스텔라>에서는 식량 부족 사태를 맞은 인류의 생존을 위해 주인공이 우주 비행을 떠납니다.

현실 세계와 다른 법칙이나 원리를 설정할 때 중요한 것은, 논리적 인과 관계입니다.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무엇이 되고 무엇은 안 되는지, 어떤 미션을 수행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를 명확하게 제시해 줘야 합니다. 그래야 이야기의 목표가 설정되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따라갈 수 있습니다. 실제 삶에서 불가사의한 일을 겪게 된다면 그 전모를 파악할 수 없게 되는 것이 맞겠지만, 창작자가 만드는 이야기 속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다 정해져 있어야 합니다.

<가려진 시간>은 판타지 설정을 전면에 내세운 영화입니다. 엄마를 잃고 새 아빠와 함께 화노도라는 섬에 이사 온 초등학교 6학년생 수린(신은수)은, 마음 붙일 데가 없어 혼자만의 상상 세계에 빠져 삽니다. 하지만 곧 성민(이효제)이란 아이와 친해지고, 둘만의 비밀 글자로 교환 일기를 쓰며 즐거운 나날을 보냅니다. 어느 날 두 아이는 친구들과 함께 산으로 놀러갔다가 기이한 일을 겪게 되고, 수린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행방불명되고 맙니다. 온 동네가 발칵 뒤집힌 가운데, 자신이 훌쩍 커 버린 성민이라고 주장하는 남자(강동원)가 수린의 앞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성민이 일종의 시간의 덫에 갇혔다 풀려났더니 어른이 됐다는 이 영화의 설정은 그 자체로는 매우 흥미롭지만, 그것을 뒷받침하는 논리가 매우 허술합니다. 왜 성민은 이런 시간의 덫에 걸린 것인지, 그 차원 안에 갇히면 얼마 만큼의 시간이 어떤 식으로 흐르는지, 무슨 일을 해야 거기서 풀려날 수 있는 것인지 하나도 제대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저 누군가에게 들은 전설 같은 얘기로 원인을 얼버무리고, 성민은 이유도 모른 채 속절없이 나이만 먹을 뿐입니다. 그가 탈출하게 되는 것도 달의 차고 기울어짐과 무슨 관련이 있는 듯 슬쩍 암시하고 마는 정도지요.

그렇기 때문에 영화 속 설정 때문에 생긴 갈등 상황, 즉 ‘장성해서 돌아온 성민을 어떻게 주변 사람들에게 믿게 만들 것인가’를 어떻게 풀어 나가야 할 지 적절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합니다. 난국을 헤쳐 나가기 위해 수린과 성민이 하는 선택들은 누가 봐도 실패할 것이 뻔한 것들로서, 초등학교 저학년이라면 모를까 6학년 아이들이 할 만한 행동이 아닙니다. 후반부의 긴장감이 확연히 떨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주인공의 운명과 결부된 실종 사건 수사 과정이 오히려 더 논리적인 전개를 보여 줍니다. 또한 이런 사건에서 횡행할 법한 음모론과 갖가지 흉흉한 소문들이 만들어 낸 이상한 분위기가 잘 표현되어 있지요. 수린과 성민이 느끼는 압박감의 원천으로서 만만찮은 존재감이 있습니다. 하지만, 수사 과정을 통해 밝혀지는 것이 별로 없기 때문에 긴장감과 재미를 주지는 못합니다. 실종 사건 미스터리의 답은 중반부에 어른이 된 성민이 남긴 일기를 수린이 읽는 장면에서 제시된 후, 끝까지 불변의 진실로 남으니까요.

수린과 성민의 관계를 보여 주는 방식도 아쉽습니다. 한 번 절친이 되고 난 후, 두 캐릭터 사이에는 그다지 큰 갈등이 없습니다. 처음 성민이 불쑥 커서 찾아 왔을 때 수린이 두려워하는 것 말고는, 두 사람은 내내 아무 의심 없이 믿고 또 믿는 관계를 유지합니다. 그래서 좀 심심합니다. 비온 뒤 땅이 더 굳어진다는 말처럼, 적절한 수준의 갈등과 의심은 인간 관계를 더 단단하고 드라마틱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는 걸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수린 역할을 맡은 신은수는 영화 내내 신인답지 않은 안정감 있는 연기로 극 전체를 잘 이끌어 나가는 편입니다. 특히 모호하고 혼란스러운 사춘기의 표정이 생생하게 잘 표현해 냅니다. 어린 성민을 연기한 이효제 역시 솔직하고 자연스러운 감정 표현을 바탕으로 좋은 연기를 보여 주었습니다. 여러 영화에서 인상적인 아역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성인 역할 배우를 닮은 이미지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해 보입니다.

강동원은 언제나처럼 영화 속 모든 장면에서 압도적인 존재감을 보여 줍니다. 그래도 현실보다는 판타지 세계에 속한, 웃자란 아이의 캐릭터를 맡았기 때문에 보기에 부담스럽지는 않습니다. 신은수와의 밸런스나 호흡도 괜찮은 편으로, 상대 연기자가 자신의 연기를 할 수 있도록 많이 배려하는 모습이 좋아 보였습니다.

샤실 이 영화는 보는 내내 미스터리 스릴러로 풀었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을 계속 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내적 논리가 전혀 없는 설익은 판타지를 보여 주며 자꾸 믿어 달라고 하는데, 그에 비해 행방불명된 아이들을 찾는 수사 과정이 더 현실적이고 납득이 가도록 잘 구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행방불명된 사건에서 혼자 돌아온 주인공 소녀가, 사건의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꿈같은 거짓말을 늘어 놓는 사이코패스 범인에게 미혹되어 죽을 고비를 넘긴 다음 겨우 살아남는다는 식의 이야기로 만들었으면 어땠을까요. 내면적인 플롯의 관점으로는, 주변과 늘 불화하며 자신만의 세계 속에 갇혀 살던 소녀가, 지옥같은 경험을 한 끝에 언제나 자신의 곁을 지켜 줬던 사람들의 존재를 깨닫게 되면서 조금 성장하는 이야기가 되겠지요.

이렇게 풀었다면 지금보다 적은 규모의 예산과 강동원보다 덜 유명한 배우를 캐스팅해서 영화를 만들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범인으로 밝혀지고 마는 악역을 선뜻 하려는 스타급 배우는 그리 많지 않을 테니까요. 그렇지만, 영화 자체는 지금보다는 훨씬 흥미진진하고 기억에 오래 남는 영화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상업 영화를 기획하고 투자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기준은 언제나 제작비 이상의 수익을 회수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보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보수적인 잣대’는 해당 아이템이 이야기로서의 재미가 있는지 없는지를 논할 때 사용해야 하는 것이지, 보다 안전하고 리스크가 없어 보이는 방식을 선택할 때 사용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는 실패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영화 창작자들이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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