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엠 어 히어로 アイアムアヒーロー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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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9. 21. 개봉

좀비물을 특징 짓는 요소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개별적인 사고 능력 없이 똑같은 행동 패턴을 보이는 좀비들은 보통 주류 질서나 관념, 혹은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사람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그에 맞서 싸우는 주인공들은 평소 사회의 비주류로 취급되는 사람들인 경우가 많지요. 또한 좀비들보다 더 무섭고 사악한 것은 오히려 정상적인 인간들이라는 통찰과, 팔다리와 내장을 적나라하게 찢어 발기는 하드고어적 묘사도 빼놓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올 여름 시즌에 개봉했던 우리 영화 <부산행>도 좀비물로서 이런 특징을 공유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대규모 흥행을 의식하고 대중의 눈높이에 맞게 만든 영화이다 보니 ‘제대로 된’ 좀비물을 기대한 관객들에게는 아쉽게 느껴지는 면이 있었습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감정 이입할 수 있도록 주인공들을 비교적 정상적인 생활인으로 설정한 것, 서스펜스 연출과 폭력 묘사가 있긴 하지만 관객들이 불편해 하지 않는 선에서 그친 것, 재난 상황에서 드러나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이기심을 다루되 상식선을 벗어나지 않는 것 등이 그런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에 비하면 3년 연속 일본 만화대상을 수상한 동명의 인기 만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는 이 영화 <아이 엠 어 히어로>는, 그런 식의 수위 조절에 신경쓰지 않고 좀비 영화의 전통적인 특징들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데 주력합니다.

15년전 신인만화상을 수상한 이후 변변한 연재물 하나 없이 만화 어시스턴트 생활만 해오던 주인공 스즈키 히데오(오오이즈미 요)는, 기대했던 만화 잡지 연재도 무산되고 동거하던 애인에게 쫓겨나 최악의 상황에 처합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취미용으로 구입한 클레이 사격용 산탄총 한 자루. ZQN이란 바이러스가 출몰하여 좀비로 변한 사람들이 삽시간에 늘어나자, 스즈키는 몸에 절반만 바이러스에 감염된 여고생 히로미(아리무라 카스미)와 함께 도시를 탈출하여 후지산으로 향하게 됩니다.

오타쿠에 외곬수인 주인공이 좀비들과 맞서는 대립 구도, 주인공이 자신의 한계를 뛰어 넘게 되는 성장담, 자신의 이기심만 앞세운 인간들의 참혹한 최후, 좀비와 예기치 않게 맞닥뜨렸을 때 더욱 빛을 발하는 일본 호러 특유의 숨막히는 서스펜스, 피비린내 나는 좀비들과의 대결전 등이 전체적으로 균형감 있게 잘 구성돼 있는 편입니다.

특히 액션 장면들의 완성도가 높습니다. 특히 전반부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스즈키가 집 앞 골목에서 이면 도로를 거쳐 차도로 나온 다음 고속화도로까지 도망치는 시퀀스는 정교한 카메라워크와 잘 짜인 인물의 동선이 합쳐져서 색다른 스릴을 맛보게 해 준 명장면입니다.

또한, ZQN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인간일 때의 특징적인 행동을 반복하게 된다는 설정을 통해 좀비들에게 개성을 부여한 것도 특기할 만한 점입니다. 다채롭게 디자인된 좀비 캐릭터들은 이야기 전개에도 효과적으로 활용되면서 극의 재미를 더하게 되지요.

주연 배우 오오이즈미 요는 코미디와 드라마 사이를 자연스럽게 넘나드는 연기를 통해, 인물의 나약함과 치부, 후회와 두려움을 사실적으로 표현합니다. 덕분에 이야기 속 꾸며낸 캐릭터라기보다는 실제 현실에서 만나 본 적이 있는 사람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 영화의 가장 아쉬운 점은 여성 캐릭터들을 다루는 방식일 것입니다. 원작 만화와는 다르게 모두 기능적으로 소비될 뿐이거든요. 후배 어시스턴트는 메인 작가의 불륜 상대고, 여자 친구는 남자의 꿈을 몰라 주는 무정한 여자일 뿐입니다. 주요 캐릭터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몸 반쪽만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괴력을 발휘할 수 있는 히로미나, 전직 간호사로서 용감하게 좀비와 맞서는 야부(나가사와 마사미)는 자신만의 욕망이나 목표가 설정돼 있는 입체적 인물이 아닙니다. 그저, 스즈키라는 나약한 일본 남성이 자존감을 되찾는 과정을 돕기 위해 때맞춰 정해진 역할만 할 뿐이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설정해 놓은 한계 안에서 안주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게 편하고 위험 부담도 없으니까요. 하지만 이 세계는 언제나 엔트로피, 즉 무질서도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도달했다고 생각하는 행복하고 안정된 상태는 순간일 뿐, 곧바로 허물어지기 시작합니다.

좀비물은 세계의 이런 속성을 아주 극단적인 방식으로 보여 주는 좋은 예입니다. 삽시간에 퍼져 나가는 무질서와, 그것이 불러 일으키는 공포를 표현하는데 좀비만큼 효과적인 것은 없지요. 등장인물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들여 좀비와 싸워야 합니다. 계속 살아남기 위해서는 부단히 움직이고 서로 협력하며, 최선을 다해 분투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스즈키는 이름만 영웅(英雄=히데오)일 뿐, 사회가 만들어 낸 법과 질서, 선입견이라는 테두리에서 좀처럼 벗어날 생각을 하지 못한 지질한 남성입니다. 그 때문에 그의 삶은 점점 나빠지고 있었고, 급기야 좀비들이 횡행하는 극단적인 무질서를 경험합니다. 처음에는 그나마 운좋게 좀비를 피해 달아날 수 있었지만, 끝내는 결단의 시간을 마주하고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애씁니다.

물론 영화 속 주인공처럼 언제나 마음 먹은 대로 이뤄지는 것은 아닙니다. 능력이 부족하거나 운이 나빠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공 가능성이 1퍼센트라도 있다면 시도는 해 봐야 할 것입니다. 가만히 주저 앉아 시간의 파도 앞에 모든 것이 무의미해 지는 걸 속절없이 지켜볼 필요는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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