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9. 7. 개봉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주의하세요.
제작비 이상의 흥행 수입을 거두는 것이 목표인 상업 영화에서 기획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관객의 성향을 파악하고 그것을 공략하기 위한 치밀한 계획을 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요. 일반적인 소비재를 만드는 회사에서 하는 일과 비슷합니다. 타겟이 되는 관객층의 취향과 욕구를 파악하고, 그에 따라 일정 수준 이상의 품질을 지닌 영화를 만든 다음, 효과적인 마케팅을 통해 그 영화의 장점을 부각시켜야 하지요.
강우석 감독의 신작인 이 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 역시 상업 영화로서 기획된 영화입니다. 박범신 작가의 2009년작 소설 <고산자>를 원작으로 삼았지만, 고산자가 지도 제작에 매달리게 된 트라우마를 설명하는 에피소드와 주요 캐릭터들의 이름, 대동여지도 완성 전후 시점을 다룬다는 것 등이 비슷할 뿐, 전체적인 방향 설정과 분위기는 다릅니다.
영화를 구성하는 요소들의 면면을 살펴 보면 흥행 영화가 되기에 손색이 없어 보입니다. 현대 지도에 맞먹는 정교한 지도인 ‘대동여지도’를 만든 고산자 김정호가 주인공이고, 김정호의 발길 따라 아름다운 우리 산하를 스크린에 담아 냈으며, 김정호의 지도를 욕심내는 권력층도 등장합니다. 또한 검증된 배우들이 출연하였으며, 관객들이 부담없이 볼 수 있도록 곳곳에 유머가 가미되어 있고, 고산자의 절절하고 애끊는 부성애가 강조돼 있습니다. 심지어 독도 문제도 등장합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딱히 재미가 없습니다. 어떤 주제 의식을 중심으로 탄탄하게 잘 조직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한 데 모아 놓기만 했다는 느낌을 받을 뿐입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란 속담이 저절로 떠오를 정도예요.
극의 중심을 잡아 줄 인물들 간의 대립 구도가 좀 더 명확했더라면 결과는 달랐을 것입니다. 대원군과의 권력 다툼에 김정호를 끌어 들여 박해하는 것은 안동 김씨 가문이지만, 김정호의 진정한 상대는 대원군입니다. 그런데 대원군조차 김정호의 지도 작업은 인정하고 지지하지만, 지도를 활용하는 방식에 견해차가 있는 정도에 그치죠. 그렇게 대립 구도가 흐지부지 되면서 결말은 대동여지도에 독도를 넣기 위한 김정호의 노력으로 슬쩍 전환됩니다.
박범신의 원작 소설에서 고산자 김정호가 문제를 제기하는 대상은 조선의 무능력한 사회 지배층입니다. 잘못된 지도를 줘서 그의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간 현감이 나중에 안동 김씨 가문의 수장이 되어 자신을 붙잡아 놓은 것을 보며 기가 막혀 하고, 천주학을 믿는다는 이유로 끌려간 딸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지만 공고한 신분제 질서의 벽에 가로막히는 경험을 하며 환멸을 느끼거든요.
영화의 정치적인 함의에 유난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현 정권 아래에서 원작의 그런 부분을 살리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김정호가 너무 정확한 지도를 만든 탓에 국가 기밀을 유출하여 대원군에게 옥사했다는 식의, 일제에 의해 날조된 이야기를 연상시키는 지금의 플롯은 피했어야 했습니다.
오히려 ‘대동여지도’가 김정호의 혼자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조선 후기에 발달한 지도 제작 기술의 뒷받침과 그와 교류했던 수많은 실학자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라는 학계의 최신 연구 결과를 반영했다면 어땠을까요? 김정호 개인에 대한 신화는 다소 빛이 바랠 지 몰라도, 지금보다는 훨씬 의미 있는 영화가 되었을 것입니다.
강우석 감독은 지난 20여년 간 한국의 상업 영화의 상징적인 존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영화도 크게 흥행시켰을 뿐만 아니라, 숱한 후배 감독들의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전작인 <전설의 주먹>에서도 느낀 것이지만, 과거의 영광을 다시 한 번 이루고자 하는 의욕이 너무 과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그의 연출력이 가장 빛을 발할 때는 사회의 모순과 병폐에 문제를 제기하고 그에 맞서 싸우는 개인의 이야기를 다룰 때였습니다. 출세작인 <투캅스>도 그런 편이지만 그 이전에 나온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등의 초창기 학원물, <공공의 적> 시리즈, <실미도> 등 많은 성공작들이 그런 영화였죠.
지금은 사람들이 재밌어 할 것 같은 것을 쫓아 다닐 때가 아닙니다.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소재와 주제로 되돌아 가야 합니다. 그것을 시대에 맞게 가다듬어 보다 간결하고 임팩트 영화를 만들 때, 강우석 감독은 또 다시 자신의 성공 신화를 써 내려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에서 보여 준 방식으로는 미래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