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정 (2016)

MJ_P.jpeg

2016. 9. 7. 개봉

영화에서 시나리오는 기본 설계도이자 뼈대입니다. 잘 쓴 시나리오로 만든 영화는 대부분 좋은 평가를 받을 뿐만 아니라 재미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영화들이 항상 높은 대중적 인지도를 갖거나 흥행에 성공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시나리오의 완성도는 다소 부족하더라도 독특한 시각적 스타일을 가지는 등 자기만의 개성을 갖춘 영화들이 대중의 뇌리에 오래 남는 경우가 더 많으니까요.

이 영화 <밀정>을 연출한 김지운 감독의 영화들이 바로 그런 대표적인 예입니다. 시나리오 상의 약점은 분명하지만, 당대의 한국 관객들의 눈높이에 맞게 재가공된 장르 영화의 요소들을 스타일리시하게 보여 주었기 때문에 오래 기억에 남는 영화가 되곤 했습니다. <장화, 홍련>, <달콤한 인생>,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악마를 보았다> 등 그의 작품들은 전체적인 내용보다 인상적인 몇몇 장면들과 시각 스타일이 더 기억에 남는 편이지요.

<밀정> 역시 그런 경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스파이물과 느와르의 요소를 가지고 와서 1920년대 의열단의 폭탄 의거와 거기에 얽힌 인물 군상들의 이야기를 다루지만, 잘 짜여진 이야기로 관객을 설득하기보다는 프로덕션 디자인과 음악, 배우들의 연기를 내세워 인상적인 장면들을 만드는데 주력하거든요.

각본 상의 문제는 비교적 분명합니다. 초반부에 인물들의 목표가 잘 설정돼 있지 않기 때문에, 화려한 도입 시퀀스가 끝나고 한동안은 의도한 만큼의 서스펜스가 생성되지 않습니다. 일본 경찰 이정출(송강호)이 의열단에 접근하거나, 의열단 핵심 멤버 김우진(공유)이 폭탄 의거 계획에 참여하는 것은 자신들의 정체성에 맞는 당연한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극적 긴장감을 자아내지 못하기 때문이죠.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시작하고 3, 40분쯤 지나서 나오는, 의열단 단장 정채산(이병헌)이 이정출을 포섭하라는 지시를 내리는 장면이 영화의 진정한 출발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목표가 등장함으로써 서스펜스가 살아나고 긴장감 있는 전개가 가능해지는 시점이니까요.

이런 식의 이중 첩자를 다루는 영화치고는 논리적으로 딱 떨어지는 전개나 치열한 심리전 같은 것이 없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인물들의 다음 선택이나 행동이 필연적인 결과가 아니라, 여러 가능성들 중에 하나를 자의적으로 선택하는 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부자연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인물들은 그저 정해진 플롯 포인트를 향해 나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결말부의 어느 시점에 가면 갑자기 긴장감이 떨어지면서 지지부진하게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영화의 관련 인터뷰나 기사에서 언급되는, 인물의 심리가 강조된 명작 스파이물들이 지닌 서스펜스와 스릴을 기대하면 실망할 가능성이 대단히 높습니다. 장 피에르 멜빌의 느와르 풍 레지스탕스 영화인 <그림자 군단> 얘기도 나오지만, 그 영화와는 추구하는 미학적 목표가 다릅니다. 단지 내러티브가 잘 짜여져 있지 않다는 것만 비슷할 뿐이죠.

그럼에도 이 영화는 충분히 관람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시나리오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다른 요소들이 대단히 매혹적이거든요.

우선 공들여 구축한 미장센이 돋보입니다. 시대 배경과 장면의 느낌을 충분히 고려해서 인상적으로 재현한 공간 디자인, 캐릭터와 성격에 맞게 잘 고안된 의상과 분장, 공간을 가르며 교차되는 인물 배치와 동선, 그리고 이 모든 요소를 차분하게 잘 담아낸 촬영과 조명, 편집이 쉽게 잊히지 않을 화면을 만들어 냅니다.

미묘한 뉘앙스를 표현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는 주연 배우 송강호의 연기 역시 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드는 요소입니다. 얼굴 표정이나 몸짓 하나하나, 심지어 뒷모습까지 세심하게 신경쓴 그의 연기는 헐거운 설정과 치밀하지 못한 전개로 인해 만들어진 틈을 잘 메워 줍니다. 뿐만 아니라, 관객에게 경계선에 놓인 보통 사람의 심정이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까지 합니다.

극 중 이정출과 대립하는 하시모토 역할을 맡은 엄태구는 대배우의 아우라에 휘말리지 않고 자신의 톤을 지키면서 매우 인상적인 악역 연기를 해냈습니다. 그만큼 강렬한 모습을 보여 줄 기회는 없지만, 다른 배우들 역시 각자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편입니다. 혼자서 튀는 연기보다는 앙상블을 중요시하며 함께 있는 공간의 느낌을 전달하는데 주력하지요.

이 밖에 끔찍하고 적나라한 묘사로 죽음의 냄새를 물씬 풍기는 액션 씬들과 고문 장면들, 시나리오가 만들어 내지 못한 감정들까지 환기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는 음악이 더해지면서 이 영화의 스타일은 완성됩니다.

시나리오가 부실한 영화는 흥미진진하게 보기 어렵습니다. 자꾸 어설픈 설정이나 전개 과정이 마음에 계속 걸리기 때문이지요. 사실 이번에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밀정>은 시나리오의 부족함을 보완하기 위해 다른 요소들의 완성도를 극대화는데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고, 관객으로서 그런 부분을 챙겨 보는 재미가 있기 때문에 비교적 견딜만 했습니다.

또한 한국 사람들의 내면에 있는, 중간에서 눈치를 보며 어느 쪽으로도 쉽게 쏠리지 않되 명분을 중요시 하는 태도를 상징하는 이정출이란 캐릭터를 내세운 점도 특기할 만한 점입니다. 이런 장르의 다른 영화들처럼 인물의 영웅적인 면모를 부각시키거나 비정한 세상의 논리를 다루지 않고 일반적인 한국 사람들의 정서에 호소하는 거죠. 요즘 같은 시대일수록 그의 처지와 선택에 대해 공감할 사람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이 영화가 이렇다 할 경쟁작이 없는 이번 추석 시즌에 극장가를 석권하고 흥행에 성공하는 것은 시간 문제로 보입니다. 지지부진한 이야기에 대한 비판과 지적은 계속되겠지만요. 부족한 각본을 이만큼 흥미로운 상업 영화로 만들어낸 제작진과 배우들의 노력에 박수를 보냅니다.

Advertisements

답글 남기기

아래 항목을 채우거나 오른쪽 아이콘 중 하나를 클릭하여 로그 인 하세요:

WordPress.com 로고

WordPress.com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Twitter 사진

Twitter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Facebook 사진

Facebook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Google+ photo

Google+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s에 연결하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