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페미니스트 – 록산 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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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페미니스트> 록산 게이 지음 / 노지양 옮김 / 사이행성 (2016. 3. 14.)

처음 이 책의 제목을 들었을 때 유난히 관심이 갔던 이유는 ‘나쁜(bad)’ 이라는 형용사 때문이었습니다. 뭔가 사회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평가를 받을지언정 꿋꿋이 자기 길을 가는 그런 페미니스트의 이미지가 그려졌달까요? 하지만 정희진 선생이 쓴 추천사에도 나오듯, 이 책의 ‘나쁜’은 그런 도덕적 평가를 담은 말이 아닙니다.

저자인 록산 게이는 이 책의 서문에서 페미니즘이나 페미니스트라는 단어에 완벽하게 훌륭할 것을 요구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음을 지적합니다. 페미니즘도 모순덩어리인 인간이 만든 것인 만큼 단점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약간의 모순과 문제점만 드러나도 그것을 물고 늘어지며 이 운동의 의미를 격하시키려는 시도가 빈번하게 이뤄져 왔다는 거죠.

그래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자신은 기꺼이 불완전하고 모순된 행동을 할 때가 있는, ‘나쁜 페미니스트’가 되겠노라고. 그러면서 세상에는 한 가지의 페미니즘만 있는 게 아니라 여러가지 페미니즘이 있을 수 있으며, 각자가 지지하는 페미니즘을 존중하고 서로의 차이와 균열을 메워나갈 것을 제안합니다.

이 책의 구성은 전부 4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먼저, 가장 분량이 많은 1부에서는 여성 혐오 문제, 성폭력에 관대한 사회 분위기, 폭력적인 가부장제의 문제, 여성의 외모와 역할을 자꾸만 한정 지으려고 하는 사회의 압력 등 일반적인 페미니즘 이슈들을 다룹니다. 미국도 사회 전반이 남성 중심적 사고에 찌들어 있다는 점에서는 우리나라 못지 않은 것 같더군요.

흑인 여성으로서, 한 때 양성애자였던 적도 있는 소설가이자 미디어 비평가인 저자는 소설, 드라마, 리얼리티 쇼, 영화 등에 이르는 다양한 미국 대중 문화를 언급하며 첨예한 이슈들을 간명하게 요약하고 이해하기 쉽게 풀어 나갑니다. 또한 자신의 참혹했던 경험들을 솔직하게 드러내면서 독자와의 거리를 순식간에 좁혀 버리기도 하지요.

2부에서는 미국에서 선거 시즌만 되면 주요 이슈로 등판하는 낙태 찬반 논란과, 미국 사회에 여전히 존재하는 인종 차별 문제를 주로 다루고 있습니다. 1부에 비해 훨씬 짧지만 문제의 핵심을 잘 요약하는 편입니다.

2부 말미에 있는 ‘특권’에 관한 꼭지가 인상 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특권이란 대단한 것이 아니라 남들보다 유리한 위치를 누리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종적 특권, 젠더적 특권, 경제적 특권, 이성애자로서의 특권, 교육의 특권 등등 누구나 어떤 영역에서만큼은 다른 사람들보다 상대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갖게 마련이니까요. 예를 들면, 우리나라 사람 전체는 최빈국에서 사는 사람들보다는 더 나은 경제적 특권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자는 ’너는 남보다 더 나은 조건을 누리고 살았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거다’ 라며 상대의 주장을 무력화하려는 시도에 대해 일침을 가합니다. 그저 상대의 주장을 꺾으려고 하는 의도만 남아 있는 이런 태도는 전혀 생산적이지 않다고 말합니다. 자기도 어떤 특권을 누려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면 그런 말을 쉽게 내뱉을 수 없을 거라고 하면서, 세상에는 한 가지 정답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의견이 모두 진실일 수도 있다는 태도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합니다.

3부는 개별 영화들 속에서 여성과 흑인들이 어떻게 다뤄지고 있는지를 비평한 글이 들어 있습니다. 창작자가 어떤 의도를 갖고 만들었는지 체크하는 식의 접근법은 저도 자주 사용하는 방식이라 대체로 공감가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특히 <노예 12년>과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에 대한 글들이 인상적입니다.

에필로그 역할을 하는 4부에서는 저자의 문제 의식과 주장을 간결하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먼저, 성공해서 유명해진 여성들마저도 페미니즘에 대한 잘못된 고정 관념을 지니게 되었다면서, 백인 이성애자 중심의 배타적인 주류 페미니즘을 비판합니다. 하나의 페미니즘만이 옳은 것이 아니라 각자의 상황에 따른 페미니즘이 있을 수 있으며, 서로의 관점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는 걸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이 책에 관심이 있다면 저자의 생각이 잘 요약되어 있는 4부를 먼저 읽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성 차별에 반대하는 페미니즘의 정신에 깊이 공감하고 있고, 실제 생활에서도 가사와 육아 전반을 아내와 함께하는 등 여러모로 노력하는 편이지만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제 과거를 돌아보더라도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보고 행동한 적도 꽤 있었고, 지금도 남자들끼리 있을 때 여성을 성적으로 비하하는 농담을 들으면 그냥 웃고 넘겨 버리기 일쑤이니까요.

그래서 트위터에서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해시 태그 붙이기가 유행할 때도 쉽게 동참할 수가 없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살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러느냐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지요. 또한 페미니스트에 덧씌워진 사회의 이상한 편견도 저를 두렵게 만들었던 것도 사실이었고요.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나서는 조금 용기가 생겼습니다. 서문에서 저자가 이야기하듯 ‘페미니즘이 어떤 대단한 사상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의 성 평등이라는 걸 아는 순간 페미니즘을 받아들이는 건 놀라울 정도로 쉬워질 것’이니까요. 이상적인 페미니스트의 삶에 가깝기는 커녕 아직도 실수를 많이 하는 축에 드는 남성이지만,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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