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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8. 3. 개봉

일반적인 모험 영화에서 여성 캐릭터의 지분은 어느 정도나 될까요? 주인공의 조력자로 나오거나, 아니면 팜므 파탈로 등장하여 주인공의 앞길을 방해하는 경우가 보통이죠. 잘하면 남성 영웅의 사고뭉치 동반자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고, 더 운이 좋다면 자기 나름의 성장 스토리를 갖는 호사를 누리기도 합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작년에 개봉되어 열렬한 반응을 끌어냈던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같은 경우는 정말 이례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 역사에 길이 남을 여성 영웅 퓨리오사를 등장시켜 관습적인 성 역할을 가볍게 뒤집어 버렸으니까요. 이런 전복의 쾌감은 영화의 압도적인 스케일과 액션 장면들과 어우러져 영화적 재미를 극대화 하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이 영화 <마이펫의 이중생활>은 반려동물이 등장하는 모험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인만 바라보는 타입의 반려견 맥스는 주인이 동물 보호소에서 새로운 개 듀크를 입양하자 패닉에 빠집니다. 주도권을 쥐기 위해 다투던 맥스와 듀크는 결국 반려견으로서의 안온한 환경에서 튕겨져 나와 한바탕 소동을 겪게 되지요.

<슈퍼배드> 1, 2편과 그 스핀오프인 <미니언즈>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애니메이션 제작사 일루미네이션의 작품 답게, 고정 관념을 뒤엎는 특유의 상상력과 과감한 유머 감각이 돋보입니다. 영화의 주요 배경이 되는 맨하탄의 스카이라인이나, 버림받은 반려동물들의 세상인 지하 공간에서 드러나는 프로덕션 디자인도 좋습니다. 부담스럽지 않으면서도 스릴 넘치는 액션 시퀀스들도 괜찮지요.

또한 반려동믈들의 특징을 비교적 잘 잡아내어 재미있게 활용한 점도 높게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별한 지식을 찾아내어 과시적으로 써 먹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알고 있는 상식들을 이용하는 쪽입니다. 개와 고양이의 차이에 대한 상식에 바탕을 둔 몇 가지 개그 씬들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겠지요.

무엇보다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인간이 아닌 반려동물의 시점을 취하면서, 그들이 인간에게 종속되지 않은 독립적인 존재라는 점을 명확히 한다는 것입니다. 반려동물이 겪을 수 있는 여러가지 이슈들은 이야기 속 곳곳에 잘 녹아 들어 있어서, 관객으로 하여금 이제까지 해왔던 인간 중심적인 사고 대신 반려동물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합니다. 인간과 정을 나누는 존재로서 반려동물의 소중함을 깨닫게 만드는 결말부의 몽타주 시퀀스를 보고 있으면 저절로 코 끝이 시큰해지죠.

이런 식의 뒤집어 보기는 일루미네이션의 특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슈퍼 영웅 대신 슈퍼 악당을 주인공으로 삼고, 보조 캐릭터에 불과한 미니언들을 주인공으로 격상시키는 파격을 보여주기도 했으니까요. 그러나 이 제작사에게 여성에 대한 차별적 시선은 발상의 전환 대상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 영화가 두 여성 캐릭터인 기젯과 클로이에 대해 보여주는 태도는 이런 문제를 극명하게 드러냅니다. 둘은 완전히 대조적인 캐릭터입니다. 기젯은 주인공 맥스의 시선을 갈구하며 짝사랑에 빠져 있죠. 먹보 고양이 클로이는 남의 시선 따위에 신경 쓰지 않고 자기 갈 길을 가는 스타일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영화 속에서 겪는 일은 똑같이 성차별적입니다. 기젯은 사랑하는 맥스를 구하기 위해 그간의 내숭을 버리고 압도적인 싸움 실력을 보여 주지만, 맥스의 데이트 신청에 황홀해 할 뿐입니다. 여성이 잠재 능력을 발휘한 대가로 고작 남자의 관심과 사랑을 얻을 뿐이라는 건 아주 불공평하게 느껴집니다.

클로이의 경우는 좀 더 폭력적인데, 그녀는 맨하탄 동물들의 대부 격인 팝스의 파티장에서 본의 아니게 펼친 몸 개그가 유튜브 동영상으로 올라가는 일을 겪습니다. 이 뜬금없는 에피소드에는 도도하게 구는 여성에 대한 고까운 감정이 묻어 있어서, 그렇게 도도하게 굴다가 언젠가 몰카로 망신당한다는 경고처럼 들립니다.

일루미네이션의 전복적이고 발칙한 유머는 그동안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에 갑갑함을 느끼던 사람들에게 해방감을 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구태의연한 성차별적 묘사까지 웃음의 소재로 삼는 것은 지나친 오만입니다. 미국식 가족주의의 대명사인 경쟁사 디즈니조차 <주먹왕 랄프>, <겨울왕국>, <주토피아> 등의 최근작에서 여성 주인공들의 역할과 비중을 전례 없이 늘리고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이 회사가 여성에 대해 좀 더 균형잡힌 시각을 지닌 영화를 내놓기를 바랍니다. 동물의 입장도 헤아릴 수 있는데, 같은 인간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