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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7. 27. 개봉

9년 만에 ‘제대로’ 돌아온 본을 기대하는 마음은 남달랐습니다. 단순히 시리즈의 최신작이 나왔으니까 보러간다는 생각 이상의 설렘이었죠. 어쩔 수 없는 세월의 흔적에 안타까워할 것을 예감하면서도요. 마치 오래 전 헤어진 연인을 다시 만나기 직전의 마음 같은 이 느낌은, 본 시리즈를 좋아했던 관객이라면 다들 비슷하게 갖고 있는 감정인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맷 데이먼과 폴 그린그래스가 없었던 <본 레거시>가 안겨준 실망감, 그리고 <본 얼티메이텀> 이후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그만한 재미와 흥분을 선사하는 액션물이 딱히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 남다른 관심과 기대를 불러 모은 주된 이유일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영화 <제이슨 본>은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내면의 어두운 기억을 지닌 영웅 제이슨 본은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빼앗고,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은 추격씬과 탈출씬, 박진감 넘치는 자동차 액션 장면의 재미도 여전하기 때문이죠.

앞일이 어떻게 될 지 모르는 가운데 위협을 헤쳐 나가는 스릴러로서의 특징이 강했던 전작들과는 달리, 이번 작품은 관객들이 등장 인물들보다 정보를 더 많이 알고 있는 상태에서 느낄 수 있는 서스펜스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속도감이 전작들에 비해 떨어지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서스펜스 연출은 시간 지연을 기본으로 하니까요.

그렇지만 이것은 꽤 영리한 선택으로 보입니다. 영화든 소설이든, 시리즈물의 공식화된 요소가 잘 알려진 상태에서 스릴러식 구성을 반복하게 되면 지루해지게 되죠. 주인공이 비밀을 밝혀내고 목숨을 부지하는 과정이 더이상 궁금하지 않습니다. ‘뭐 어쨌든 주인공이 잘 되겠지’ 하는 심드렁한 기분으로 보게 되니까요. 갈수록 평범하고 상투적이 되어가는 007 시리즈가 바로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전의 시리즈들이 제이슨 본과 CIA의 양극 구도였다면, 이 영화는 본이 CIA 국장 듀이(토미 리 존스), 전자전 팀장 헤더 리(알리시아 비칸데르)와 함께 만드는 삼각 구도가 중심입니다. 토미 리 존스의 의뭉스러움과 알리시아 비칸데르의 야심만만함은 맷 데이먼의 우직함과 어우러져 흥미진진한 드라마를 만들어 내지요.

맷 데이먼은 언제나처럼 말없이 행동으로 보여주는 제이슨 본의 캐릭터를 잘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정신적 혼란과 내면의 상처에 힘들어 하지만,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계속 해서 싸워야 하는 그런 인물을요. 이번 영화에서는 자신이 진짜 누구인지 알게 되지만 그의 고민은 여전히 계속될 것 같습니다. 이제 그의 문제는 좀처럼 밝혀지지 않는 과거의 진실이 아니라, 치유하기 어려운 심리적 내상이 될 테니까요.

전자전 팀장 헤더 리는 그간 이 장르에 나온 여성 캐릭터들 중에서 가장 주체적이고 강인한 캐릭터입니다. 그 흔한 액션씬 하나 없지만요. 보통 이런 액션물에서 여성 캐릭터는 자기 직무에만 충실하거나, 주인공과 애정 관계를 맺거나, 조직이나 미션의 성공을 위해 헌신하는 역할만 해왔습니다. 작년에 나온 <미션 임파서블: 로그 네이션>에서 주목 받았던 일사(레베카 퍼거슨)도 결국은 그런 역할에 머물렀지요.

하지만 헤더 리는 다릅니다. 그녀는 업무 능력도 좋지만, 자신의 야심과 필요에 충실합니다. 그녀가 내리는 모든 선택은 결국 자기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과정이 되지요. 이렇게 주관이 뚜렷하고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그녀의 존재는 기존 방식의 대결 구도에 기분 좋은 파열음을 일으키며 극의 재미를 더합니다.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 오른 <로얄 어페어>로 할리우드의 눈도장을 찍은, 스웨덴 배우 알리시아 비칸데르는 <청춘의 증언> 류의 시대물부터 <엑스 마키나> 같은 SF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에서 자신의 캐릭터를 갈고 닦아 왔습니다.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대니쉬 걸>로 여우조연상을 받은 것은 그런 노력에 대한 보상이었죠.

이 영화에서도 어떤 배우와 붙어도 밀리지 않는 화면 장악력을 보여주며 좋은 연기를 펼쳤습니다. 아직 어리지만 앞으로의 성공이 더욱 기대되는 배우입니다.  내년까지 소개될 주연작이 4편이나 되고, 2018년에 공개된 <툼 레이더> 리부트 영화에서 라라 크로프트 역할을 맡아 액션까지 소화할 예정이니까요.

본 시리즈가 21세기 액션 스릴러 영화들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큽니다. 전세계 액션 영화에서 박진감 넘치는 카메라 앵글과 사실적인 카 액션 씬, 배우가 직접 연기하는 맨몸 액션 장면들이 급증한 현상은 이 시리즈의 성공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테니까요.

하지만, 그동안 어떤 영화도 이 시리즈를 뛰어넘지는 못했습니다. 이 영화 <제이슨 본> 역시 그렇습니다. 기술적 완성도와 쾌감이 굉장했던 <본 얼티메이텀>(2007)이나, 영화 사상 가장 잘 만든 속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본 슈프리머시>(2004) 만큼 대단한 재미를 준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나온 어떤 스파이 액션물보다도 집중하면서 볼 수 있는 작품이었고, 시종일관 흥미진진했습니다. 실망할 수밖에 없을 거란 생각에 많은 기대를 하지 않았음에도 이 정도의 쾌감을 줄 수 있다는 것이 참 반갑게 느껴졌지요. 앞으로 몇 년을 더 기다려도 좋으니 폴 그린그래스 감독과 맷 데이먼 조합의 시리즈 후속편을 또 한 번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