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7. 20. 개봉
좀비가 등장하는 영화는 조지 A. 로메로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이후 여러가지로 변주되어 왔습니다만, 기본적으로 호러/스릴러 장르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심지어 <새벽의 황당한 저주>처럼 코미디로 변주되거나, 최근 트렌드인 포스트 아포칼립스 설정 – 미국 드라마 <워킹 데드>처럼 세계 멸망을 일으킨 특정 사건이 발생한 후의 상황을 배경으로 하는 경우 – 을 취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좀비물을 보러 극장에 가는 관객들은 최소한 호러/스릴러 장르가 주는 쾌감, 즉 서스펜스와 스릴을 맛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합니다. 맹목적인 공격성을 지니고 병증을 전염시키는 좀비라는 존재는 현대인에게 공포 그 자체이니까요.
이 영화 <부산행>은 한국의 주류 상업 영화 최초로 할리우드 식의 좀비를 등장시킨 영화입니다. 좀비 묘사와 설정만 놓고 보면 괜찮습니다. 신선한 시각적 아이디어가 빛을 발하는 장면들도 여러 군데 있습니다. 할리우드와는 비교할 수 없이 적은 예산으로 이만큼 실감나게 좀비를 보여 준 것은 꽤나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것 외에는 높이 평가할 만한 부분을 찾기가 힘듭니다.
먼저, 호러/스릴러 장르에서 필수적인 서스펜스와 스릴이 부족합니다. 어떤 일이 실제로 일어나기 전까지 느끼게 되는 조마조마한 마음을 가리키는 서스펜스는 관객과의 밀당이 중요하지요. 관객이 이제 그만 좀 하라고 소리치기 직전까지 밀어붙일 때 극대화되는 쾌감이니까요.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예측 가능한 모든 일이 순서에 맞게 일어날 뿐, 의도적인 시간 지연이나 관객을 헛갈리게 하는 과정이 전혀 없습니다. 또한 주요 인물들에게 분배한 역할이 애초부터 지나치게 단순하고, 선악 구도마저 확실해서 그들의 운명이 별로 궁금하지 않아요. 심지어 샷 구성이나 편집마저도 관습적인 방식으로 반복될 뿐이라서, 이 영화가 서스펜스 효과에 관심이 있긴 한가 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또한, 어떤 인물이 죽을 위험에 처한 걸 보면서 느끼는 아슬아슬함이라고 말할 수 있는 스릴은, 해당 인물을 극한적인 상황까지 몰아 붙였다가 간발의 차이로 살아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관객이 ’이러다간 진짜로 죽을 수도 있겠는데?’ 하는 느낌을 받도록 말이죠.
그나마 이 영화는 관객이 스릴을 느낄 수 있게 연출하는 데 신경을 쓴 편입니다. 숱한 액션 씬들에서 그런 노력이 두드러집니다. 감독이 인터뷰에서 종종 말했던 ‘액션이 내러티브를 대신하게 하려고 했다’는 이야기는 아마도 이것을 두고 한 말일 겁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별로 효과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일단 샷이 부족해요. 편집도 딱히 효과적인 것 같지는 않고요. 평범한 구도의 샷 몇 개만 가지고는 아무리 편집을 많이 해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죠. 그래서인지 인물들이 관객의 예상대로, 딱 알맞은 타이밍에, 준비된 방법으로 위험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아무래도 감독이 자기 스타일을 고수한 탓이 아닐까 싶습니다. <돼지의 왕>, <사이비> 등의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주목받았던 연상호 감독은 사실 전작들에서도 샷이나 편집 감각이 별로 좋은 편은 아니었지요. 이 영화에는 웹툰을 보는 것 같은 샷 구성과 편집이 자주 눈에 띕니다.
큰 규모의 상업 영화에서는 촬영 감독이나 편집 감독의 조언을 잘 받아들이면 작품 전체의 퀄리티가 올라가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지 않은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더구나 언론 인터뷰에 나오듯, 감독이 정해진 회차보다 빨리 찍었다는데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을 보면 더욱 그랬을 가능성이 높죠.
서스펜스와 스릴이 부족하기 때문에, 자연히 우리의 시선은 인물들 사이의 드라마로 옮겨집니다. 이 재난 상황이 그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주목하면서요. 그러나 이 부분에 있어서도 딱히 이렇다 할 재미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인물 설정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죠.
관객의 입장에서 볼 때, 주요 인물들 중에서 살아남을 지 여부가 중요한 인물은 마동석이 연기한, 임신한 아내에게 꼼짝 못하는 터프가이 캐릭터 밖에 없습니다. 대사 한 마디만 주고 받아도 캐릭터 본연의 매력이 돋보이거든요.
그러나 나머지 인물들에겐 별로 관심이 가지 않습니다. 기차 타기 전의 개인사가 별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인물들을 잘 모르고, 모르다 보니 마음을 줄 수 없는 거죠. 그래서 좀비에게 물리면 물리나 보다, 죽으면 죽나 보다 하고 심드렁하게 인물들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안타깝고 스릴 넘치는 순간이 마동석 캐릭터가 죽는 씬인 것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공유가 연기한 중심 인물은 여러모로 아쉽습니다. 기차 타기 전 어떤 삶을 살았는지 관객이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임에도 현실감 있게 감정 이입할 수가 없습니다. 특히 딸과의 관계는 머리로만 생각해서 만들어 낸 전형적인 설정이고요. 게다가, 상황을 주도하지도 않고 그냥 계속 떠밀려만 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들은 시종일관 무덤덤하게 그의 움직임을 구경할 수밖에 없지요. 그의 마지막 선택과 운명이 작위적인 신파로 느껴지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나마 인물들을 관통하는 테마가 있다면 사랑하는 사람이 좀비로 변하는 것을 지켜보는 애달픔, 또는 좀비가 무서우면서도 서글픈 존재라는 인식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들을 강력한 중심 주제로 형상화할 탄탄한 내러티브가 없기 때문에, 아주 기초적인 수준의 감정으로 처리되고 맙니다.
<부산행>은 개봉 첫 주말까지 누적 관객 530만명을 동원하며 여름 시장의 승자로 등극할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변칙 개봉 논란을 불러 일으켰던 유료 시사회를 거치고, 1700개가 넘는 주말 스크린을 장악하면서요. 그런데, 과연 그만한 흥행 성적을 거둘 만큼 영화적 재미가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좀비에 관한 묘사는 볼 만하지만, 그것이 2시간 남짓한 길이의 영화를 재밌게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니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