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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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6. 1. 개봉

원작 소설을 영화로 만들 때에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원작을 거의 그대로 일대일 대응에 가깝게 스크린에 옮기는 경우도 있고, 소재와 주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적절한 변형을 하기도 하며, 소재와 기본 설정만 남긴 채 완전히 다른 작품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세라 워터스의 소설 <핑거스미스>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박찬욱 감독의 신작 <아가씨>는 이 중에서 맨 마지막 방법을 택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작과의 비교만 갖고 영화의 좋고 나쁨을 논의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원작과 달라진 부분을 아쉬워할 수는 있겠지만요. (이런 아쉬움은 원작 소설을 소개한 다른 포스트에 적어 놓았습니다.)

이 영화는 두 주인공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였던 원작과는 달리, 히데코(김민희)가 오랜 억압에서 벗어나는 과정에 집중합니다. 외형적인 플롯의 차원에서 볼 때, 명쾌한 답이 있으면서도 균형잡힌 서사를 추구했고 그 결과물도 그리 나쁘지 않은 편입니다. 영화의 기술적인 완성도 역시 매우 높은 편이지요. 아마도 올해 개봉한 한국 영화들 중에서는 가장 잘 만들어진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몇 가지 아쉬운 부분은 있습니다. 먼저, 원작과 비슷하게 1~3부 구성을 취한 것이 별로 효과적이지 않았습니다. 이 영화는 누가 봐도 히데코의 탈출하려는 욕망에 관한 이야기인데, 그 욕망은 영화가 시작한 지 1시간이 지난 2부가 되어서야 제대로 소개됩니다. 그 전까지 관객은 1부의 중심 인물 숙희를 지켜봐야만 합니다. 참신하고 야성적인 매력은 있으나 히데코를 향한 마음 외에 자기 욕망은 없는, 조금은 심심한 인물을요.

<공동경비구역 JSA> 이후 <스토커>까지 박찬욱 감독의 작품들을 돌이켜 보면 언제나 강력한 중심 캐릭터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인공의 욕망 – 그것이 복수든 애욕이든 탈출이든 – 을 처음부터 소개하고, 그것이 외부의 현실 세계와 충돌하는 지점을 포착한 다음, 그 갈등 양상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것이 그의 장기였지요. 따라서 극에 대한 몰입도가 꽤 높았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몰입도가 덜 한 편입니다.

해결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3부의 느슨함도 영화의 재미를 떨어뜨리는 데 큰 몫을 합니다. 3부의 전개에 특별히 논리적 오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생각대로 어렵지 않게 이루어지는 히데코의 계획은 별다른 재미를 주지 못합니다.

특히 결말부에 딱히 후일담이 궁금하지도 않은 백작과 코우즈키를 등장시켜 그들의 한심함을 부각시킨 것은, 숙희와 히데코의 탈출 시퀀스가 가졌어야 할 카타르시스를 반감시킵니다. 정말 악랄하고 강력한 악당과 맞서 싸워 이겼을 때 쾌감이 있는 것이지, 이 정도로 허술하고 찌질한 작자들한테 승리하는 것은 쉽고 뻔한 일로 보이니까요.

이 영화는 우리나라 주류 상업 영화로서는 드물게 레즈비언 커플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켰습니다. 하지만 히데코와 숙희가 성소수자로서 현실감이 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다. 여자가 여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인간 사회에서 내면화된 금기인데,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그에 대한 의식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 두 사람의 관계는 금기를 깬다는 데서 나오는 쾌감이나, 남들에게 들킬까봐 걱정하는 데서 나오는 긴장감을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숙희가 분개하면서 코우즈키의 서재를 망치는 장면은 이런 한계를 함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언뜻 보기에, 그녀는 이런 변태적인 것들은 다 없애야 한다면서 코우즈키를 단죄하고 히데코를 구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더러운 취향에 대한 낙인 찍기는 될 수 있을지언정 코우즈키의 행위에 대한 항의나 징벌이 되지는 못합니다. 코우즈키의 진짜 나쁜 점은 변태적인 취향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남을 기묘한 방식으로 학대해 가면서 자신의 욕망을 채웠다는 데 있기 때문이죠.

또한 숙희의 이런 1차원적 반응은 자기가 사회적으로 다수에 속하기 때문에 ‘정상’이라고 믿는 이성애자들의 전형적인 행동 패턴에 가깝습니다. 스스로가 성소수자라는 자의식이 있다면 하기 힘든 행동이지요. 개인의 성적 취향 때문에 변태라고 낙인 찍히는 일은 자기도 언제든지 당할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을 테니까요.

이런 맥락에서 영화의 엔딩을 장식하는 히데코와 숙희의 섹스씬은 모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들이 그토록 분개했던 코우즈키의 책 속에 있던 장면 중 하나를 그대로 재현하며 즐거워하니까요. 감독의 의도대로 이것을 일종의 창조적 극복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지금처럼 중간 단계가 제시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다소 과도한 논리의 비약이라고 느껴집니다.

이 영화 <아가씨>는 박찬욱 감독의 다른 작품들과 비교했을 때 덜 치밀한 편입니다. 모든 것이 쉽고 분명하게 흘러가지만, 딱 맞아 떨어진다는 느낌은 부족합니다. 그의 영화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금기를 넘나드는 과정에서 생성되는 서스펜스도 없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감독이 흥행 결과에 너무 책임감을 느낀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흥행 결과에 대해 나몰라라 하는 다른 감독들에 비한다면 훨씬 바람직한 모습이긴 해요. 기본적으로 모든 영화는 제작비 회수가 가능한 수준의 판매 수익을 올릴 수 있어야 하니까요. <아가씨>의 경우는 순제작비가 120억원이나 되는 영화이니 더 신경이 쓰였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흥행 여부 때문에 그동안 확립해 놓은 자신의 고유한 방식 대신, 보다 많은 관객들과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사용했다는 것은 좀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제작비가 신경쓰인다면 애초부터 비용이 적게 들도록 아이템을 설계하거나, 다른 파트에 들어가는 비용을 줄여서 제작비를 낮춰야 하는 것 아닐까요? 다음 번에는 박찬욱 감독이 관객의 반응보다는 그간 자신이 보여줬던 예술적 비전에 보다 충실한 영화로 돌아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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