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5. 4. 재개봉
(이 영화는 2014년 2월에 최초 개봉하였습니다. 재개봉에 맞춰 보다 자세한 리뷰를 작성하였습니다. 개봉 당시의 간단한 리뷰 바로가기)
취학 전의 어린 아이들을 보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엿보입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시스템에 적응하는 경험을 하기 전까지는, 세상이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러나 점차 나이를 먹어가면서 자신의 한계를 깨닫게 됩니다. 무엇을 잘하고 못하는지, 어디에 흥미가 있고 집중하게 되는지 스스로에 대해 너무 잘 알게 되지요.
그러나 많은 경우 곧 까먹게 됩니다. 현대 사회는 시스템의 효율성과 편의에 따라 사람들을 평가하고 재조직할 뿐 개개인의 가치나 취향에 관심이 없으니까요. 자기만의 어떤 것을 위해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 것보다는, 세상의 흐름에 자기 자신을 맡기는 것이 편안하고 자연스럽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주지시킬 뿐입니다.
이 영화 <레고 무비>의 주인공 에밋도 그런 논리에 푹 빠져 사는 청년입니다. 설명서에 정해진 순서대로 하루를 시작하고, 일터에 나가 똑같은 노래를 부르며 일을 하며, 언제나처럼 같은 방식으로 하루를 마감하지요. 그의 겉모습 또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레고 사람일 뿐입니다.
이런 그에게 변화의 계기가 찾아옵니다. 공사장 지하에서 우연히 ’저항의 피스(piece)’를 찾게 된 것이죠. 그것을 찾아내는 사람이 레고 세상을 구원하리라는 예언이 걸려 있는 특별한 조각 말입니다. 설명서가 없이도 레고 블럭으로 무엇이든 만들 수 있는 ‘마스터 빌더’도 아닌 평범남 에밋이 그 임무를 완수해내기란 참으로 어려워 보입니다.
컴퓨터로 디자인된 레고 블럭을 사용하여 만든 이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은 <반지의 제왕>과 <매트릭스>, <스타워즈> 같은 기존의 영화들 – 모두 소명을 받은 자가 임무를 완수하는 내용의 영화들이죠 – 을 슬쩍 슬쩍 패러디합니다. 또한 여러 차원의 레고 세계를 구경하는 재미와 함께 미국 대중문화의 대표적인 아이콘들을 등장시켜 그들을 희화화하며 웃음을 주고, 박진감 넘치는 액션 시퀀스도 보여주는 등 시종일관 흥미진진하게 전개됩니다.
특히 목소리 연기를 맡은 배우들의 연기가 뛰어난데, 코미디 연기에 일가견이 있는 크리스 프랫(에밋 역)과 엘리자베스 뱅크스(와일드스타일/루시 역)의 앙상블이 좋습니다. 나쁜 경찰 역할의 리암 니슨과 예언자 역할의 모건 프리먼은 평소 이미지를 약간 비튼 캐릭터를 시침 뚝 떼고 연기하죠. 에이미 폴러의 남편이기도 한 윌 아넷이 연기한 배트맨도 난데없이 튀어 나와 배꼽을 잡게 만듭니다.
각본과 감독을 맡은 필 로드와 크리스토퍼 밀러는 최근 할리우드에서 가장 주목받는 콤비입니다. 자신들의 장편 데뷔작인 애니메이션 <하늘에서 음식이 내린다면>의 성장 테마와, 두번째 장편이자 첫 실사 영화인 <21 점프 스트리트>에서 보여준 코미디 감각을 잘 버무려 흥미로운 작품을 만들어 냈습니다.
특히 레고 블럭을 가지고 놀 때 생기는 딜레마, 즉 설명서를 따라할 것이냐 아니면 자기 맘대로 만들 것이냐를 극의 주요 쟁점으로 끌고 들어와 이야기의 테마로 삼은 것이 돋보입니다. 레고 놀이의 핵심적인 특징을 이보다 잘 잡아낼 수는 없을 겁니다. 그야말로 ‘레고 무비’라는 제목에 걸맞는 주제 선택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 두 사람은 이 영화의 성공 이후 일복이 터졌습니다. 속편인 <레고 무비 2>의 제작-감독-각본, 스핀오프 격인 <레고 배트맨 무비>, <레고 닌자고 무비>의 제작을 맡고 있습니다. 또한 <스타워즈>의 한 솔로 스핀오프 프로젝트의 연출자로도 내정된 상태입니다.
결국 이 영화의 메시지는 자기는 능력이 없으니 설명서대로 살아야겠다는 식으로 가능성을 제한할 것이 아니라, 한계를 두지 말고 끝까지 노력하라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데 겁 먹은 어린이나 청소년들에게 용기를 주고, 평소 아이들에게 규율을 과도하게 강조해 왔던 어른들에게 다시 생각해 볼 기회를 허락합니다. 물론, 이미 정해진 경로를 벗어나 자기의 길을 개척하느라 애쓰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따뜻한 격려를 전하지요.
어쩌면 이것은 미국 사회에나 어울리는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미국은 개성 있고 창의적인 것을 만드는데 들이는 개인에 노력에 대해 보다 많은 가치를 부여합니다. 또한 그에 걸맞는 보상 체계도 잘 갖추고 있지요. 물론 성공하는 사람은 여전히 한정되어 있지만요. 미국이 수많은 내적 모순에도 불구하고 여러가지 분야에서 혁신을 이뤄내며 여전히 선진국의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겁니다.
우리나라 젊은이들에게는 이 영화의 메시지가 꿈같은 얘기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한국 사회는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창업, 발명, 창작 등에 들이는 시간과 비용을 제대로 보상해주지 않지요. 기껏 기술을 개발하면 대기업이 헐값에 사들이거나 고사시키고, 새로 시장에 진입한 회사나 신인들은 그 다음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손해를 감수해야 합니다. IMF 이후 십 수 년간 청년들이 스펙 경쟁에 내몰린 것으로도 모자라 흙수저론 같은 푸념까지 하게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좋은 영화를 보고도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는 현실이 참 안타깝습니다. 우리나라 기성 세대들이 자기네들의 알량한 기득권을 지키려고 애쓰거나 자기들의 관점만을 강요하려 하지 않고, 다음 세대가 좀 더 기를 펴고 앞날을 개척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데 더 신경을 쓰기를 바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