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4. 14. 개봉
이 영화 <크로닉>은 죽음을 앞둔 환자를 돌보는 간병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환자들의 심리 상태나 간병인의 작업 태도에 대한 기본적인 묘사가 아주 사실적이죠. 집안에 아픈 사람이 있거나, 그와 유사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정도로요. 감독 미첼 프랑코가 이 영화의 아이디어를 얻은 것도 할머니의 간병인을 관찰하게 되면서였다고 합니다.
간병인 데이빗은 심각한 질병으로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의 환자들을 돌보며 살아갑니다. 그에게는 개인적인 삶이 없어 보입니다. 직접 간병을 하지 않는 시간마저도, 환자를 돌보기 위해 준비하고 재충전하는데 사용하니까요. 자신의 환자와 깊은 감정적 유대를 갖고 잘 훈련된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고자 하는 그의 노력은 환자들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지나쳐서 환자 가족들의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도 하죠.
말기의 환자나 간병인이 등장하는 영화들을 보면 아쉬울 때가 있습니다. 많은 경우, 이슈가 될 만한 부분만 비정상적으로 부풀리거나 다른 주제를 표현하기 위한 소재로 삼고 말거든요. 하지만 이 영화는 다릅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여러가지 논쟁거리들을 담담하게 응시하죠. 죽음을 대하는 태도, 병자를 둔 가족들의 입장, 간병인의 문제 등 어쩌면 철학이나 의료 윤리 같은 분야에서 다루어야 할 것만 같은 주제들을 오롯이 잘 담아내고 있습니다.
미첼 프랑코는 전작 <애프터 루시아>(2012)처럼 고정된 카메라 앵글과 길게 지속되는 샷을 통해 느리고 차분한 템포를 유지합니다. 그렇게 생긴 여백은 관객이 자신의 기억을 떠올리고, 영화에서 제기하는 문제를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합니다.
많은 예술영화나 독립영화들이 비슷한 스타일을 시도하지만 이 영화만큼 성공적인 경우가 많지 않은 것은 결국 시나리오 때문입니다. 이렇게 서브 플롯을 풀 여지가 없는 영화일수록 설정부터 결말까지 이야기를 끌고 가는 구성을 단단하게 잘 잡아 놓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영화가 너무 많습니다. 심지어 이야기라고 할 만한 것이 없을 때도 있죠.
또한 제법 쓸 만한 이야기를 갖추고 있지만, 다루고 있는 소재나 문제 의식이 보편성을 띠지 않아서 실패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신이 겪어 보았거나 생각해 볼 만한 문제를 다루고 있지도 않은데, 느리고 불친절한 영화를 참아줄 관객은 많지 않으니까요. 물론 코드가 맞는 일부 관객의 열성적인 지지를 받을 수는 있겠지요.
그런 면에서 감독이 직접 쓴 이 영화의 시나리오는, 길게 찍기와 원씬 원컷 스타일로 만들어진 영화에 딱 맞는 이상적인 교본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작부터 결말부의 짧은 절정에 이르기까지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나가는 전개는 일견 불친절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세심하게 잘 깔려진 복선들이 제공하는 단서들을 찾고 나면, 이야기 전체가 핵심 아이디어와 유기적으로 잘 연결돼 있다는 걸 알 수 있지요.
주인공 데이빗 역할을 맡은 팀 로스는 몇 개월에 걸친 연구 조사를 통해 베테랑 간병인의 몸짓과 작업 태도를 그대로 재현합니다. 이 냉정하고 담담해 보이는 전문가의 외면은, 그의 내면에 침잠해 있는 슬픔의 감정과 강렬한 대비를 이루지요. 만성의, 심각한 질환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형용사인 이 영화의 제목 ‘chronic’은 어쩌면 그의 슬픔을 묘사하기 위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죽음은 누구나 언젠가는 맞닥뜨리게 될 미래의 문제지만, 동전의 이면처럼 우리 삶에 딱 들러붙어 있는 현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 영화 <크로닉>은 죽음과 관련된 여러가지 쟁점과 딜레마를 극화함으로써 늘 우리 곁에 있는 죽음의 존재를 환기합니다. 물론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않습니다. 이 문제에 관해 딱부러지는 정답이 있다고 한다면 그건 거짓말일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