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보 Trumbo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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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4. 7. 개봉

미국에서는 올해 있을 대선 후보 경선이 한창입니다. 예년과 달리 특이한 점은 당 외부 인사들인 버니 샌더스와 도널드 트럼프가 민주, 공화 양당의 경선에 참가해서 선전하고 있다는 겁니다. 특히 공화당 대선 후보 1위를 달리는 트럼프는 여러가지 막말과 기행으로 공화당 내부에서조차 난감해 한다고도 하죠.

그러나 2차대전 후 지금까지 역대 공화당 정권과 그 지지자들이 보여준 모습을 되짚어 보면 오늘날 트럼프가 하는 막장 짓거리가 유별나 보이진 않습니다. 무작정 핵 개발에 매진했던 아이젠하워, 워터게이트 스캔들의 장본인 닉슨, 네오콘을 주류로 격상시킨 레이건, 재임기간을 대외 전쟁으로 허비한 부시 부자 같은 사람들을 대통령으로 내세우고 추종했던 사람들이니까요.

이 영화 <트럼보>의 주요 배경이 되는, 1947년에서 1960년까지의 기간에도 그들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민주당 트루먼 정권을 흔들기 위해 반미활동조사위원회를 주도했던 공화당과 그것을 지지했던 영화계 인물들 – 서부극 스타 존 웨인을 비롯하여 배우 출신으로 나중에 대통령까지 되는 로널드 레이건 등 – 의 행동은 요즘 트럼프가 하는 짓에 결코 뒤지지 않습니다.

할리우드에서 최고의 재능을 뽐냈던 시나리오 작가 달튼 트럼보는 미국 공산당에 가입하여 여러가지 사회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던 사람입니다. 영화 스탭들의 임금 인상을 위한 파업에 강력한 지지를 보내기도 했지요. 사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그는 철저한 공산주의자라기보다는 양심적인 리버럴에 가까운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사상이 의심스러운 자로 지목되어 반미활동조사위원회에 출석을 요구받습니다.

위원회에 출석한 그는 미국 수정헌법 1조에 적시된 ‘발언의 자유(freedom of speech)’를 들어 답변을 거부합니다. 그 결과 같은 선택을 한 다른 9명의 사람들과 함께 의회모독죄로 고발되어 징역까지 살게 되죠. 이들은 ‘할리우드 텐(10)’이라 불리면서 메이저 영화사들로부터 공식적으로 고용을 거부당합니다. 그들 외에도 당시 할리우드 영화판에서 쫓겨나 유럽 등지로 떠나거나 업종을 바꿔야 했던 사람들은 수백명에 이릅니다.

가족의 생계를 위협받는 상황에서 달튼 트럼보가 택한 것은 여러 개의 필명으로 B급 영화의 시나리오를 공장 돌리듯 찍어내는 것이었습니다. 10년 가까운 이 기간은 작가 본인에게나, 가족들에게나 고통스러운 과정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다른 작가의 이름을 빌린 <로마의 휴일>(1952)과, 가명을 사용한 <브레이브 원(The Brave One)>(1956)으로 아카데미상을 두 차례나 수상하는 영광을 누린 것도 바로 이 시기였지요.

이 영화 속에는 이런 일련의 과정들이 매끄럽게 잘 요약돼 있습니다. 트럼보의 행적을 연대기 순으로 정리하면서, 중간 중간에 유명 스타들의 모습을 끼워 넣어 볼거리를 제공하기도 하고, 트럼보가 실제로 했을 법한 내적 고민들을 담고 있는 대화 씬들을 통해 인물을 좀 더 입체적으로 그리려 노력합니다.

이런 방식은 인물의 삶을 넓게 조망하고 다양한 면모를 살피는데 확실히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다루는 범위가 넓고 초점이 여러 개이기 때문에, 효과적으로 잘 조직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장단점을 모두 갖고 있다고 해야 할까요? 그래서 일반 영화팬들 보다는, 할리우드 고전 영화에 익숙한 올드팬이나 영화 제작 과정이나 영화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 또는 영화 업계 종사자들이 더 재미있어 할 영화입니다.

타이틀 롤을 맡은 브라이언 크랜스턴의 연기가 확실히 좋은 편입니다. 인기 미드 <브레이킹 배드> 시리즈의 주인공으로서 복잡미묘한 감정 상태를 효과적으로 표현했던 그는, 여기서도 달튼 트럼보의 복합적인 면모를 생생하게 연기해냅니다. 이 작품으로 올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도 올랐었죠.

트럼보의 아내 클레오로 출연한 다이안 레인과, 트럼보를 궁지에 몰아넣는 배우 출신 칼럼니스트 헤다를 연기한 헬렌 미렌, 고전기 할리우드의 명배우 에드워드 G. 로빈슨 역할을 맡은 마이클 스털바그도 각자의 캐릭터에 걸맞는 안정된 연기로 튼튼하게 극을 뒷받침합니다.

역사적으로 정치 권력이 학문과 예술을 탄압한 예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심지어 우리나라에서는 이게 현실입니다. 현 정권이 돈줄과 인사권을 가진 거의 모든 분야에서 벌이는 전횡은 통탄할 지경이죠. 그런 우리에게 달튼 트럼보의 이야기는 어떤 희망을 줍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재능과 노력을 바탕으로 버텨내는 사람과, 그가 만들어낸 가치 있는 예술은 오래도록 기억될 테니까요.

하지만 여기에는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정치 권력의 교체입니다. 이것 없이 예술가가 자신의 작품만으로 사회적 권리와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에서는 스치듯 묘사하고 지나가지만, 트럼보의 복권은 공화당에서 민주당으로 정권이 교체되는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걸 눈여겨봐야 합니다.

‘모든 것은 시간이 다 해결해 준다’, ’권력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라는 말들은 그 자체로는 틀린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문제제기와 저항이 없다면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 겁니다. 이웃나라 일본을 보세요. 2차대전 후 지금까지 자민당의 일당 독재가 깨지지 않고 이어진 탓에, 사회 전체가 점점 활력을 잃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총선이 정말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첫걸음은 올바른 투표’라는 누군가의 말을 다시금 되새겨 볼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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