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3. 30. 개봉
인간이라면 누구나 권태의 늪에 빠집니다. 반복되는 일상이 지루하게 느껴지고 어디서도 삶의 재미를 찾기 힘든 것은 모두 ‘이만하면 됐다’는 생각 때문이지요. 먹고 살 만해지고 인생의 목표로 삼았던 것들이 하나 둘씩 이루어지기 시작하는 중년의 나이는 권태에 사로잡히기 아주 좋은 시기입니다.
이 영화 <아노말리사>의 주인공 마이클도 마찬가지입니다. [고객을 어떻게 대할까] 라는 베스트셀러의 저자로서, 전국을 돌며 강연을 하는 그는 서비스업 종사자들 사이에서는 얼굴이 제법 알려져 있을 정도로 성공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전혀 행복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비슷비슷하고 지루하며 신경을 거슬리게 하니까요.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이 영화는 마이클이 느끼는 세상을 표현하기 위해, 그를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은 모두 똑같은 얼굴을 한 캐릭터로 등장시킵니다. 단지 헤어스타일과 복장만 다를 뿐이죠. 이들의 목소리도 톰 누넌이라는 배우 한 사람이 목소리 톤만 바꿔가며 연기합니다.
이처럼 악몽 같은 현실 속에서 숨막혀 하던 마이클에게, 완전히 색다른 목소리 하나가 들려 옵니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 리사는 예쁘지도 않고 몸매도 별로이며 얼굴에 상처까지 있어서 자신감이 하나도 없는 여성입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내면의 특별함이 있습니다. 리사가 마이클에게 신디 로퍼의 히트곡 “Girls Just Wanna Fun”을 조용히 불러주는 장면은 그녀의 특별함을 잘 보여주는 동시에, 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라 할 수 있죠.
각본과 공동 연출을 맡은 찰리 카우프먼은 기발한 설정이 돋보이는 영화들의 각본을 썼던 시나리오 작가입니다. 인형술사가 유명 배우 존 말코비치의 머릿속으로 들어가는 길을 발견한다거나(<존 말코비치 되기>(1999)), 유인원처럼 털이 많이 나는 여성을 등장시킨다거나(<휴먼 네이쳐>(2002)), 실연의 상처를 잊기 위해 기억 삭제 시술을 받는(<이터널 선샤인>(2004)) 등 그의 작품들은 누구도 생각해 내지 못할 만큼 독특하고 창의적인 데가 있었죠.
그렇지만 <시네도키, 뉴욕>(2008)으로 감독 데뷔한 후, 몇몇 프로젝트가 무산되는 등 다소 부침을 겪었습니다. 이번에도 킥스타터를 통해 크라우드 펀딩으로 제작비를 마련했지요. 하지만 이 영화로 지난해 베니스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고, R등급(미국의 18세 이상 관람가) 애니메이션으로는 최초로 올해 아카데미 최우수 애니메이션 후보에 오르면서 재기의 발판을 만들었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 마이클은 사실 매우 감정 이입하기 힘든 인물입니다. 찌질하고 불평 불만에 가득찬 중년 남성 그 자체이거든요. 그래서 주인공의 입장이 되어 영화 속 상황을 대리 체험하는 식으로 관람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대신 그를 관찰과 풍자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되지요. 어쩌면 우리 모습이 저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요.
삶이 공허하고 지루하며 아무런 의미도 찾을 수 없을 때는 스스로의 변화가 필요한 법입니다. 인생의 즐거움은 늘 새로워지는 데서 나오는 거니까요. 이건 특별한 통찰이 아닙니다.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죠. 다만 실천에 옮기는 사람이 적을 뿐입니다. 이미 누리고 있는 것들을 잃게 될까 봐, 혹은 또 다시 실패할까봐 시도조차 하지 못하는 동안 시간은 속절 없이 흘러가 버립니다.
우리들 개인의 업적이나 성과는 인간이라는 종 전체의 차원에서 보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닐 겁니다. 그러니 성공 못한다고 해서, 꿈을 이루지 못한다고 해서 실망하고 낙담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의 임무는 이어달리기의 한 주자로서 다음 세대에 배턴을 잘 넘겨주는 것일 뿐이니까요. 이왕 세상에 태어나 살게 된 거, 습관과 고정관념에 매여 불행하게 사는 것보다는 새로운 일과 생각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즐거움을 느끼면서 흥미진진하게 사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