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들어서 마블 코믹스의 슈퍼 히어로들이 각광을 받고는 있지만, 원래 미국 슈퍼 히어로의 대명사는 DC 코믹스의 슈퍼맨, 배트맨, 원더우먼 등이었습니다. 일찍부터 애니메이션과 영화로 만들어져 세계 시장에 소개된 것이 이들의 명성을 높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죠. DC의 모회사가 메이저 영화사인 워너브라더스이기 때문에, 마불에 비해 영상물 제작이 수월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마블의 기세에 영 맥을 못 추고 있습니다. 마블의 <어벤져스>(Avengers) 시리즈와 비슷하게 여러 캐릭터들이 집단으로 등장하는, <저스티스 리그>(Justice League)의 영화판 제작이 여러가지 이유로 계속 연기된 것이 가장 큰 이유였죠. 그러다가 2013년에 발표된 슈퍼맨 리부트 <맨 오브 스틸>(Man of Steel)이 흥행 성공을 거두자,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세계관 ‘DC 확장 유니버스’(DC Extended Universe)를 바탕으로 한 영화를 만들기로 합니다. 이 영화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은 그 두번째 작품입니다.
사실 <맨 오브 스틸>은 흥행 성적에 비해서는 생각 이상으로 지루한 영화였습니다. 이야기의 초점이 어디에 있는지 불명확하고 서스펜스가 하나도 없는 각본과, 특수 효과만 화려할 뿐 인물의 감정을 너무 과장하고 질질 끄는 연출 때문이었죠. 이번 작품에도 그 때의 각본가 데이빗 S. 고이어와 감독 잭 스나이더가 참여했기 때문에, 관람전 기대치가 딱히 높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르고>(Argo)(2012)로 2013년 아카데미 각색상을 받았던 크리스 테리오가 완성시킨 이 영화의 시나리오는 전작보다 훨씬 좋습니다. 초반부터 주된 갈등 요소들을 명백하게 제시하여 무엇에 대한 이야기인지 규정하고, 중반 이후의 전개에 필요한 복선들을 차근차근 잘 깔아 놓았으며, 배트맨과 슈퍼맨의 심리 변화 과정도 구체적으로 잘 보여 주거든요. (크리스 테리오는 후속작 <저스티스 리그>의 시나리오도 맡아 썼다고 합니다.)
아쉬운 점은 이 영화가 <맨 오브 스틸>과 뒤이어 나올 <저스티스 리그>를 연결해 주는 역할에 너무 충실하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명확히 설명하지 않고 넘어가는 부분이 많습니다. 3년 전에 나왔던 <맨 오브 스틸>에서 소개된 사항은 따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저스티스 리그>에서 설명될 예정인 경우에도 그저 떡밥만 던져 놓고 슬쩍 건너뛰어 버립니다. 이런 불친절함 때문에 한 편의 영화로서 자체 완결성은 다소 떨어져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마치 궁금한 부분이나 설명 안된 부분이 많은, 미드의 한 시즌만 몰아서 본 느낌이랄까요.
감독을 맡은 잭 스나이더의 연출 또한 여전히 아쉽긴 합니다. 그는 언제나처럼 화려한 영상 효과를 앞세워 말초적인 감각에 직접적으로 호소하지요. <300> 같은 영화들에서처럼요. 또한 으스스한 분위기를 조성하다가 놀래키는 식의, 호러 영화 스타일의 장면 구성을 많이 합니다. 문제는 그가 만든 대부분의 장면들에 서스펜스가 부족하거나 아예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괜히 질질 끌기만 하는 것처럼 보이죠. 서스펜스를 창출하려면 인물의 상황이나 감정에 대한 정보를 관객과 적절한 수준으로 공유하는 것이 필요한데, 그런 것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그나마 이 영화에서는 그런 약점이 덜 노출됩니다. 다들 너무 유명한 캐릭터들이라 관객들이 그 행동 패턴과 사고 방식에 익숙하기 때문이죠. 또한, 시나리오의 구성도 그들의 감정을 유추하기 쉽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개인적인 트라우마와 죄책감에 시달리는 배트맨이, 슈퍼맨에 대한 의혹과 공포를 가감없이 표현한 끝에 슈퍼맨과 육체적 대결을 벌인다’는 메인 플롯에 모두가 잘 연결돼 있으니까요.
새로 배트맨 역할을 맡은 벤 애플렉은 이 영화에서 설정된 캐릭터에 꼭 알맞는 이미지와 연기를 보여 줍니다. 그는, 자신은 정신적 압박감에 시달리면서도 책임을 다하겠다며 총을 들고 거리로 나서는 백인 자경단원 혹은 사립탐정에 가까운 이번 배트맨에 너무 잘 어울립니다. 슈퍼맨 역의 헨리 카빌도 전작에서보다는 훨씬 더 안정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죠.
슈퍼맨 시리즈의 유명한 악역 캐릭터인 렉스 루터 역으로 참여한 제시 아이젠버그는, 평소의 연기 톤을 버리고 다소 들떠있는 미친 천재 과학자 연기를 선보입니다. 그의 원래 연기톤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많이 어색할 수 있는데, 영화가 끝날 때쯤에는 결국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는 데 동의하실 겁니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이 영화의 최고 캐릭터는 갤 가돗이 연기한 원더우먼입니다. 출연 분량은 많지 않지만 후반부 전투 씬에서 보여주는 포스가 정말 엄청납니다. 내년에 개봉 예정인 단독 출연 작품 <원더우먼>이 진짜 기대될 정도로요.
이번 주 미국 개봉을 앞두고 현지 평론가들의 반응이 시원찮은 편인데,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우선, 완전히 새로운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에도 워낙 코믹스 팬덤이 강력하기 때문에 기존 작품들과의 비교를 피할 수 없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코믹스와 비교해서 두드러지게 비교 우위를 갖는 지점이 없다면 당연히 비난받을 수밖에 없겠지요.
또 다른 이유는 경쟁사인 마블의 슈퍼 히어로 영화가 이미 시장에서 확고한 기준이 돼버렸다는 데 있습니다. 마블의 영화들은 전형적인 영웅 신화의 이야기 구조를 따르는 방식으로 재구성되어 호응을 얻었습니다. 그러니, 음모에 빠져 허우적 대는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하드보일드 탐정 영화의 방식을 따르는 이 영화가 아쉽게 느껴질 수밖에요. 평론가들이 서로 다른 장르의 영화를 같은 것으로 놓고 비교하는 오류에 빠진 것은 아닐지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마블이나 DC의 코믹스 팬이 아닌, 영화를 좋아하는 보통의 한국 관객인 저로서는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아쉬운 점이 눈에 띄긴 하지만 마블과는 다른 맛이 있어 흥미로웠고, 따라서 앞으로 나올 캐릭터 단독 작품이나 저스티스 리그가 궁금해지기 시작했으니까요. <맨 오브 스틸> 때문에 실망했던 분들이라면 그 영화보다는 나으니까 의심과 불안을 접고 보셔도 됩니다. 물론 <맨 오브 스틸>과 연결되는 지점이 많기 때문에, 영화 관람 전에 그 재미없는 영화를 슬쩍이라도 리마인드 해야 한다는 게 괴로운 일이 되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