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롤 Carol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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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2. 4. 개봉

파격적인 사랑 이야기가 흔히 취하는 구성은 ‘평범하지만 안정된 생활을 하던 주인공이 새로운 사람을 만나 불꽃 같은 사랑을 한다. 그렇지만…’ 입니다. 대개 뜨겁게 달아오른 섹스 장면이 전면에 부각되고, 사랑 그 자체보다는 기존의 사회적 관계와의 갈등에서 이야기의 주된 동력을 얻습니다. 그런 사랑의 결론은 파국이고, 삶의 교훈을 얻기 위한 일종의 과정으로 취급되기 일쑤죠.

하지만, 이 영화는 정반대의 길을 걷습니다.

먼저, 테레즈와 캐롤에게 기존의 연애 관계나 결혼 생활은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평범함, 안정됨 이런 거랑은 거리가 멀죠. 자기가 원하는 것만 요구하는 남자친구 혹은 남편은, 보통 수준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그냥 친구도 못 되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테레즈와 캐롤이 서로 만나 교감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은 단순한 일상 탈출이 아니라, 최소한의 숨쉴 공간을 확보하는 생존의 노력이 되는 겁니다.

또, 섹스 장면을 스펙터클하게 찍거나 사회적 압력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이 영화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는 경험 그 자체이니까요. 루니 마라가 연기하는 테레즈는, 우리가 진짜로 사랑에 빠졌을 때의 바로 그 표정과 몸짓을 너무나 가슴 저미도록 잘 표현합니다. 첫 만남, 첫 식사, 집으로의 초대, 둘만의 여행과 꿈만 같은 시간들…. 그 모든 상황에서의 설렘과 흥분, 떨림을 말이죠.

케이트 블랜칫이 연기한 캐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딸의 양육권을 갖고 훼방을 놓는 남편의 행동은 이야기의 전환을 가져오는 플롯 포인트의 역할만 할 뿐이죠. 결국 영화가 관심 있는 것은 시종일관 우아함과 당당함을 잃지 않는 캐롤의 내면, 그리고 자신의 오판을 인정하고 진정한 사랑을 찾는 용기니까요.

감독 토드 헤인즈는 배우들의 디테일한 연기 하나하나 – 아주 섬세한 리액션까지 – 를 정확하게 화면에 담아냅니다. 배우들과의 신뢰 관계를 바탕으로 자연스러운 표현을 이끌어 낸 것이죠. 그래서인지 이 영화에는 심금을 울리는 인상깊은 장면들로 가득합니다.

첫 식사 장면에서 신분과 취향의 차이를 인지하고 거리를 두려 하면서도 서로에게 끌리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 서부 여행을 떠나 어느 호텔 식당에서 캐롤이 방 번호를 기억 못하자 테레즈가 방 번호를 냉큼 불러 주는 장면에서 주고 받는 신뢰와 사랑의 눈빛, 불의의 일격을 당하고 차를 타고 돌아오는 와중에 테레즈가 캐롤에게 울먹이면서 전하는 진심어린 미안함과 안타까움 같은 것들 말이죠. 이런 모습이 주는 감동이, 바로 이 영화가 성적 취향을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깊은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비결입니다.

쓸쓸하지만 화려한 색감이 돋보였던 <파 프롬 헤븐(Far from Heaven)>(2002) 이후로 계속 토드 헤인즈와 같이 작업해 온 촬영 감독 에드워드 래크먼은 이번 영화에서 50년대의 분위기를 내기 위해 일부러 수퍼 16mm 필름을 사용했습니다. 주인공들이 혼자 있을 때는 각종 창문이나 프레임을 통해 보여주면서 갇혀 있는 느낌을 강조하는데, 종종 창문에 비치는 반사광들을 덧붙여서 그 싱숭생숭하고 쓸쓸한 마음의 결을 잘 표현 해냅니다.

극 중에서 사진과 음악은 두 연인을 이어주는 중요한 모티프입니다. 그렇지만, 어려운 은유나 의미를 담지는 않습니다. 말 그대로 두 사람을 이어줄 뿐이지요. 시각 예술인 사진의 특성과, 음악의 시간 예술로서의 특징을 모두 지닌 것이 바로 영화라는 점을 고려하면 여러모로 괜찮은 설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에서 사랑을 훼방 놓는 진짜 적은 캐롤 자기 자신입니다. 스스로 한계를 만들고 감옥 속에 들어가 버리니까요. 결국 사랑을 완성하는 결정적인 열쇠는 자신이 원하는 바대로 당당히 선택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니 이 영화의 주제는 ‘사랑의 쓴 맛을 통해 성숙해진다’가 아니라, ‘스스로의 성장을 통해 사랑을 완성한다’가 됩니다. 그것이 바로 이 영화 및 원작 소설이 지닌, 다른 이야기들과 구별되는 특별한 매력입니다.

원작 소설이 처음 출간되던 1950년대 뿐만 아니라 지금도 미국 사회는 동성애에 관대하지 않습니다. 옛날보다는 훨씬 낫지만 여전히 편견과 싸워야 하는 것이 사실이니까요. 작가가 필명으로 발표했다가 자신이 썼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기까지 38년이 걸렸을 정도죠. (물론 의식 수준이 조선시대에서 별로 발전하지 못한 우리나라보다는 당연히 낫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다른 어떤 것보다 우리 자신이 중요하며, 환경을 탓하지 말고 주체적인 결단을 통해 운명을 바꾸라’는 메시지를 담아낸 원작자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목소리는 21세기의 한국에서 지옥같은 삶을 살아가는 평범한 우리에게도 큰 힘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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