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wajang

2015. 4. 9. 개봉

김훈의 동명 원작 소설은 원래 싫어하는 작품입니다. 작중 화자의 윤리적 결벽증이 유난스럽다 느꼈거든요. 위악적으로 표현된 여성 성기에 대한 이상한 집착 같은 것도 그렇고. 숨김 없이 낱낱이 드러내고자 한 것이 작가의 의도였겠지만, 마치 자신의 삶에 대한 남다른 자부심이나 자존심의 반어적 표현처럼 느껴져서 불편했습니다.

원작에 비해 이 영화의 각본은 좀 더 부드러운 방식을 택합니다. 보편적으로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상황에 주인공을 집어 넣고 그 반응을 지켜보는 시간을 충분히 줌으로써 좀 더 공감이 가는 인물로 형상화합니다. 원작자의 치열한 문장들이 빠져나간 그 여백에, 관객은 자기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고 버무림으로써 주인공의 상황에 좀 더 확실하게 감정이입할 수 있게 됩니다. (물론 열심히 살아온 전형적인 한국 장년층 남자의 고민과 감정이다 보니, 젊은 세대이거나 외국 사람이라면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습니다.)

안성기는 지친 장년의 모습을 몸짓과 표정만으로 탁월하게 그려냅니다. 그가 다른 캐릭터와 나누는 대화 장면보다 아무 말 없이 혼자 있는 장면들이 더 많은 이야기를 해주거든요. 몇몇 씬을 제외하면 감정의 포인트를 짚어내는 능력이 대단한 배우라는 것을 재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부인 역할을 맡은 김호정의 열연도 그의 감정씬들이 없었다면 이만큼 빛을 발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요즘 대부분의 한국 영화들은 소재가 되는 아이디어만 좋을 뿐, 이야기로서의 가치는 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말도 안되는 논리나 감정 흐름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기 때문에 도저히 공감할 수 없거나, 플롯 구조상 정해진 단계를 진부한 방식으로 통과하는 식이니까요. 하지만, 이 영화는 실제 삶의 논리와 감정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깊은 감동을 줍니다. 그냥 가장 기본적인 것들을 하고 있을 뿐인데도 말이죠. 올해 본 가장 좋은 한국영화 중 하나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