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GL

2015. 3. 26. 개봉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 영화의 시놉을 처음 보았을 때 별로 땡기지가 않았습니다. 아프리카 난민들을 돕는 백인이 나오는, 뻔한 휴머니즘 영화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러나 북미에서 평이 나쁘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감독이 제가 좋아하는 영화인 라자르 선생님의 필립 팔라르도였기 때문에 반신반의하면서 보러갔습니다.

초반에 수단 어린이들이 내전으로 부모와 마을을 잃고, 살아남기 위해서 사막을 건너 케냐까지 가는 여정이 전형적인 방식으로 소개될 때만 해도 걱정스러웠습니다. 그들이 겪은 고초를 자세히 보여줌으로써 동정심을 자아내려는 거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제가 처음부터 이 영화를 아예 잘못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런 류의 영화라면 대부분 수단 난민들을 돕는 사람 중에 하나가 주인공인 경우가 보통이니까 여기서도 리즈 위더스푼이 주인공이겠지,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난민들에게 감정 이입을 하지 않고 그녀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었지요. 그런데 이 영화에서 리즈 위더스푼은 초반에서 중반으로 넘어가는 지점이 되어야 나오는, 조연에 불과합니다. 제 선입견과는 달리, 이 영화의 주인공은 수단 난민들이었던 겁니다. 그들을 주인공으로 놓고 봐야 이야기의 모든 요소가 제자리에 잘 놓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자존감을 절대 잃지 않으면서 숭고한 인류애를 실천하는, 전형적인 영웅 서사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이런 픽션의 세계에서 뿐만 아니라, 실제 삶의 자리에서도 우리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도움이 필요한 ‘대상’으로 바라보기 쉽습니다. 동시에 그들을 도와야 한다는 도덕적 당위를 떠올리면서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합니다. 그들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해 보려는 노력은 잘 하지 않으면서요. 어쩌면 제가 경계했던 값싼 휴머니즘은, 우리의 이런 자기중심적인 사고 방식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감독의 전작인 라자르 선생님과 이 영화는 여러 면에서 닮아 있습니다. 난민으로 망명한 사람이 주인공이고, 그들과 기존 사회의 구성원들이 교감을 갖는 과정을 다루면서, 난민에 관한 법률 체계가 지닌 비인간성을 지적하기 때문입니다. 두 작품 모두 잔잔하지만 깊은 감동을 주는 것도 공통점입니다. (하지만 스타일 면에서는 이 영화가 영웅 서사를 바탕으로 한 고전적 할리우드 영화의 방식을 따르는 반면, 라자르 선생님은 에릭 로메르 영화 같은 모던한 방식이라 많이 다릅니다.)

어쩌면 이 영화의 결말부가 이상적인 동화 같다며 냉소를 보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느끼기에는 그것이 바로 인간사의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인간은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면서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종이니까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란 말 속에는 이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한자의 사람 인(人)자도 그런 사실을 형상화하지 않습니까?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몇 명의 특출난 사람들이 사회 발전을 이끈다거나, 우리가 더 나은 처지에 있으므로 못한 사람들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식의 얘기입니다. 낙수 효과라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말들이야말로 현실의 권력을 유지하고 싶은 인간들이 만들어낸 신화이니까요. 인류사의 위인들, 사회적으로 안정된 사람들, 재벌 기업 총수들의 존재를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존재는 누군가가 그들이 짊어져야 할 짐을 나눠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 영화의 끝에는 다음과 같은 아프리카의 격언이 등장합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