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5. 22. 개봉
근래 보기 드문 독창적인 설정을 가진 영화이지만, 감독의 관심이 새로운 관계에 대한 가능성에 있지 않고 위의 트윗에서 언급한 식의 닳고 닳은 현실의 관계를 또 한 번 겪는 주인공 남성의 감정에 있는 것 같아서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이 좋은 설정을 이런 식으로 사용하고 말아 버리다니. 확실히 스파이크 존즈는 찰리 카우프먼의 각본을 영화화했던 예전의 초기작들, 그러니까 존 말코비치 되기와 어댑테이션 때가 참 좋았던 것 같다.
음성으로 대화할 수 있는 인공지능 OS와 사랑에 빠진다니, 그게 가능해? 라는 물음은 OS 목소리로 출연하는 스칼렛 요한슨의 음성을 듣는 순간 간단히 깨져 버린다. 약간 허스키한 음색의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순식간에 그녀에게 빠져들기 때문이다. 철없이 사랑에 빠진 어린 연인에서 스스로 성장한 끝에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며 이별을 고민하는 성숙한 여인에 이르는 폭넓은 감정을 목소리만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능력이다. 물론 여기에는 스칼렛 요한슨이란 실제 배우가 가진 외형적인 성적 매력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사실 판타스틱 소녀백서나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같은 영화에서 처음 봤던 그가 이렇게 다양한 연기 톤을 선보이며, 야심만만한 작품 선택을 해내는 배우로 성장할 지는 솔직히 생각도 못했다. 섹시한 젊은 여성이라는 기본 이미지는 벌써 예전에 넘어섰고, 올해 개봉한 돈 존이나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에서 볼 수 있듯이 이제는 작품 한 편을 온전히 좌지우지하는 존재감을 과시하는 수준이니까. 앞으로도 그녀의 행보는 주목할 만하다.
호아킨 피닉스는 최근 들어서 젊은 시절의 상남자 망나니 이미지를 탈피하며 섬세한 내면의 움직임을 표현하는데 주력하고 있는데 이번 작품의 선택도 역시 그런 맥락의 연장선 상에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그의 강렬한 외모를 콧수염 등으로 가려 부드럽게 만들려는 감독의 시도는 실패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강렬한 외모와 섬세한 감정 표현 사이의 충돌에서 나오는 드라마틱함을 활용할 수 있는 여지를 스스로 없애 버렸기 때문이다.
덧붙이자면 우리 에이미 아담스 여사는 이 영화에서 또 한번의 존재감 없는 조연 역할로 시간을 낭비하고 계신다. 다음 번에는 좀 더 좋은 작품으로 만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