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 Noah (2014)

2014. 3. 20. 개봉

대런 애러노프스키가 즐겨 다루는 소재는, 인생의 어느 시점에 성공을 거두지만 그것을 주체 못하고 자기 파괴적이 되어버린 인간의 이야기다. 그리스 신화 속 이카루스의 운명 같은. 그의 장점은 이 닳고 닳은 옛날 이야기를 현대의 일상적인 배경으로 가져와 꼼꼼한 디테일을 바탕으로 되살려 낸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매우 감동적으로. (어쩌면 그래서 천년을 흐르는 사랑이 별로였던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번 작품은 원래 다른 의도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설화를, 자기가 즐겨 다루는 소재의 관점으로 해석하려고 하다 보니 무리가 따른다. 감독이 나름대로 창조해낸 고대의 풍경은 굉장히 아름답고 흥미진진하지만, 주인공 노아는 별로 매력적이지가 않다. 그는 신의 뜻을 파악하는데 성공하지만 결국 그것을 주체 못하고 자기 파괴적이 된다. 근데, 진짜 추락은 경험하지 못한 채 밋밋하고 어설프게 깨달음을 얻는다. 그래서 재미가 없다. 캐릭터가 바뀌면 자연스럽게 제반 상황들도 바꿔 주어야 하는데, 다른 건 대부분 성서 기록 그대로에 가까워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이제 러셀 크로우나 제니퍼 코넬리의 시대는 가고, 엠마 왓슨이나 로건 레먼의 시대가 왔구나 하는 생각이 확실히 든다. 둘은 월플라워에서 보여 주었던 케미를 다시 보여준다. (물론, 셈 역할 배우를 너무 의도가 보일 만큼 느끼한 배우로 캐스팅해서 그런 걸 수도 있다.)

창조과학 하는 사람들이나 반대쪽에서 그걸 비난하는 사람들이 모두 똑같이 저지르는 오류는 성서 편집자(들)의 의도와 메시지를 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들 대홍수나 바벨탑, 천지창조가 실제로 있었는지 없었는지, 있었다면 어떤 증거가 그걸 뒷받침하는지 이런 것만 두고 논쟁할 뿐이다. 전래 설화들을 어떤 기준으로 선택하고 배치하는지, 왜 유독 특정 율법이 더 강조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기독교를 무작정 반대하는 쪽에서는 그저 성경은 모두 지어낸 이야기나 설화의 집합이며, 심지어 의도가 개입되지 않은 우연의 산물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이야기나 저작물들은 어떤 의도를 갖고 만들어지기 마련이다. 무의식적으로 취합한 문장들을 무작위로 배치하지 않는 이상. 글을 쓰는 이들마다 돈을 벌겠다든지, 어떤 이상을 설파하겠다든지, 감동을 주겠다든지 등등 다 목적과 의도가 있다. 이 글을 쓰는 나도 내 생각을 남들에게 알리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 같은 게 있다.

하물며 수천년 간 종교 경전이었던 성경이 만들어질 때 어떤 의도나 교리가 개입되지 않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오히려 종교 경전이기 때문에, 사실 그 자체를 갖고 논하기보다는 편집자가 그 이야기를 집어 넣은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일을 해야하는 사람들이 목사고 성경 교사들인데, 대부분의 경우 쓸데없이 변죽만 울리거나 헛소리를 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비극이다.

노아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창세기 전체 – 나아가 모세 5경, 어쩌면 구약 전체 – 를 꿰뚫는 주제인, ‘세상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겸손하게 받아들이기’에 대한 설화다. 그것을 믿는 사람들이 하는 일종의 신앙 고백이다. 창조 설화도 바벨탑도 모두 같은 얘기를 하기 위해 배치된 것이다. 하나님 뜻에 따르면 만수무강, 그렇지 않으면 필멸.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라, 이거다. (그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게 어떤 거냐는 물음이 있을 수 있는데, 성서는 그 본보기 인물로 구약에선 모세를, 신약에선 예수를 제시한다.)

이런 의도에 대한 탐색이 없으면 성서의 가치는 날아가 버리고 증명할 수 없는 주장과 의견만 남는다. 역사적 사실임을 증명한다며 고고학적 증거를 찾거나, 이 영화처럼 나름의 과학적 상상력과 결합시키고 하는 것은 그냥 개인의 자유로운 활동으로 인정받는 데 그칠 것이다. 창조과학이 욕을 먹어야 하는 이유는 특정인들의 개인적인 믿음과 상상력으로 만든 껍데기에 불과한 것을 남들에게 진리라고 강요하기 때문이다. (최고의 기독교 영화로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의 마태복음과 마틴 스콜세지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 꼽히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사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이런 논쟁이 커지면 커질수록 이익을 보는 사람들이다. 이번 경우엔 보수화된 교회 목사들이나 영화 흥행업자들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