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따뜻한 색, 블루 La vie d'Adèle (2013)

2014. 1. 16. 개봉

영화나 소설 같은 내러티브 장르에서 감동을 느끼는 이유 중 하나는 그것이 우리 삶의 어떤 측면에 대한 은유로서 다가오기 때문이다. 잠시 고개를 들어 우리가 – 혹은 사람들이 – 좋아하는 영화들을 떠올려 보면, 모두 그런 특징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이야기의 완성도나 창의성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다.

대부분의 많은 영화나 소설들이 실패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삶을 현실적으로 모사하는데 전력을 기울이지만, 정작 일상의 은유로서 우리가 눈돌리지 못했던 부분을 깨닫게 해주는 데까지는 가지 못한다. 그 때문에 그냥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종류의 이야기, 굳이 돈들여 극장에 가지 않아도 보고 들을 수 있는 이야기를 하다가 마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것은 비단 상업적인 장르 영화 뿐만 아니라 예술 영화라고 하는 장르에서도 마찬가지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는 여러가지로 뛰어난 점이 많은 영화다. 끈질기게 배우들을 몰아가는 감독의 연출력과 의지, 배우들의 온몸을 던지는 연기, 화면의 색감과 안정된 카메라워크 등등.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이 영화의 원제인 ‘아델의 이야기 1장, 2장’이 뜬 다음에 남는 물음은 역시 ‘그래서 어쩌라고?’다.

영화 속에서 아델의 겪는 일들은 수많은 성장담에서 늘 반복되는 일이며, 정상적인 성인이라면 누구나 경헙해 봤을 그런 것들이다. 물론 보편적이지는 않은 관계이며, 묘사 수위도 높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그런 경험을 겪고 나서 얻기 마련인 쓰디쓴 무언가에 대한 언급이 별로 없다. 감독은 그저 마지막까지 끌어 왔던 자신의 스타일만 유지할 뿐, 하나만 더를 외치지 않는다. 이것이 이 영화가 가진 결정적인 한계이며, 그 넘치는 열정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는 이유인 것 같다. 그래서 더 아쉽다.

p.s. 이 영화에서 좀 안타까웠던 것은 원작 그래픽 노블에서 그대로 따온 듯한 몇몇 대사들이다. 그 자체로 삶에 대한 은유인 이 대사들은 책에 박힌 글자로 읽을 때 훨씬 더 풍부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을 것 같다. 영화 속에서 귀로 들으니 대사의 의도가 너무 빤하게 드러나서 오히려 가치가 반감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