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2013년은, 언제나 그렇듯 한국 영화계의 일원으로서 관객들에게 감사해야 하는 한 해였습니다. 1인당 영화 관람 횟수가 세계 최고를 기록한 데에 힘입어, 매 시즌마다 폭발적인 흥행을 기록하는 한국 영화들이 나올 수 있었으니까요.
예년에 비해 고무적인 것은 전형적인 장르 영화로서의 쾌감에 집중하는 영화들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많은 한국 영화들은 복합 장르 영화이거나, 특정 장르를 표방하더라도 장르의 클리셰만 건드리다 말거나, 장르의 틀만 빌려와서 한국 특유의 캐릭터 드라마로 만들어 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올해 나온 몇몇 작품들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든 즐길 수 있는 장르적 요소를 충실하게 갖춘 영화였습니다.
할리우드 영화는 연초에 소개된 아카데미 경쟁작들의 수준이 예년에 비해 특히 뛰어났고, 그들의 자본과 기술력으로만 만들 수 있는 영화들이 우리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었습니다.
이른바 예술 영화로 묶이는 비 할리우드 외국 영화들은 몇몇 배급사의 노력으로 겨울방학 시즌에 집중 소개되는 것으로 정착된 것이 반가운 소식이라면 소식입니다.
2013년에 꼭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영화들을 개봉일 순으로 꼽아 보았습니다. 총 21편입니다. 냉정히 내치지 못한 영화들이 좀 있어서 편 수가 조금 늘었네요.
라이프 오브 파이
새해 첫 개봉작으로 산뜻하게 테이프를 끊어 준 작품. 지금까지 나온 영화 중에서 3D 기술을 내러티브에 가장 잘 통합시킨 영화입니다. 3D 영화의 앞날을 비관적으로 보는 저로서도 이 영화만큼은 꼭 3D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더 헌트
하루 아침에 아동 성추행범으로 몰린 주인공이 겪는 수난을 통해, 정신차리지 않으면 누구나 빠져들 수 있는 파시즘적 광기의 무서움을 보여줍니다. 올해 미드 <한니발>로 대박친 매즈 미켈센의 뛰어난 연기가 돋보이죠.
베를린
오늘의 한국 영화계가 가진 역량의 최대치를 유감없이 보여준 작품입니다. 이 영화 한 편으로 각본과 연출, 연기, 촬영, 편집, VFX 등 각 분야의 기술적 완성도가 할리우드에 결코 뒤지지 않는 수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액션 스릴러 장르 영화의 쾌감을 놓치지 않으면서 중심 인물들의 캐릭터도 어느 정도 살려낸 점을 높이 평가하고 싶네요.
문라이즈 킹덤
어찌 보면 단순한 성장담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갈 수 있지만, 이런 영화일수록 재미있게 만들기가 더 어렵습니다. 기존에 만들어진 작품들도 워낙 많기도 하고요. 동화보다 더 동화 같은 세계를 잘 다루는 웨스 앤더슨의 능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로맨틱 코미디이긴 하지만 징한 캐릭터 드라마이기도 한 이 작품은 감독인 데이빗 O. 러셀의 최고작입니다. 제니퍼 로렌스와 브래들리 쿠퍼의 앙상블은 이 장르가 종종 잃어버리기 쉬운 현실감을 단단히 붙잡아줍니다.
남자사용설명서
웃자고 만든 영화에 죽자고 달려들 필요는 없습니다. 최근 몇 년간 제일 재밌게 본 코미디 영화. 미술 등이 키치해서 그렇지 샷이나 편집 감각은 작년 한국 개봉작 중에서도 완성도가 높았죠. 그래서 더욱 캐스팅이 아쉬웠던 영화.
스토커
박찬욱 감독의 할리우드 진출작. 히치콕의 <의혹의 그림자>에 대한 설득력 있고 짱짱한 오마주. 두 번째 볼 때 재미가 더해지는, 참 드문 영화.
오즈 그레이트 앤 파워풀
프리퀄로는 무난하고 재미있는 각본과 연출이었죠. <오즈의 마법사>를 꼭 다시 읽고 보세요. 미셸 윌리엄스가 생각만큼 예쁘게 나오지는 않습니다 :)
링컨
역시 스필버그, 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잘 만든 서사물. 인물 드라마로서의 전기 영화란 이런 것이라는 전범을 보여줍니다. 로우키 화면이 선사하는 시각적 쾌감도 좋고요. 다니엘 데이 루이스야 뭐 늘 소름끼치도록 자기 몫 이상을 해 주는 배우니까요.
장고: 분노의 추적자
저는 여전히 타란티노가 영화 매체가 전달해 주는 쾌감을 가장 잘 이해할 뿐만 아니라, 그걸 자기가 만드는 영화로 온전히 구현해낼 줄 아는 몇 안 되는 현역 감독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언맨3
아이언맨이란 캐릭터 자체가 너무 좋은 데다, 3편은 여러모로 가장 업그레이드된 버전이니 재밌지 않을 수가 있나요.
라자르 선생님
저는 요런 식의 단순하지만 이야기의 강력한 힘을 보여주는 영화가 좋더라고요. 이렇게 강력한 도구를 잘 사용할 실력을 갖추지 않고 편법만 찾으면 영화가 안 나옵니다.
앤젤스 셰어
켄 로치 영화 중 가장 밝고 즐거운 영화. 그러나 여전히 전선은 명확하고 입장은 확고부동합니다.
월드워Z
초반 30분의 뛰어난 박진감과 중반 1시간의 괜찮았던 흐름이 마지막 30분에 흐릿해지면서 아쉬움을 남기긴 하지만, 이런 영화를 할리우드에서 안 찍어 주면 어떻게 보겠어요.
인 더 하우스
프랑수아 오종은 확실히 원작이 있는 각색물을 더 잘 찍는 거 같아요. 에릭 로메르 영화에 자주 나오는 파브리스 루치니를 볼 수 있어서 반가웠습니다.
사이드 이펙트
스티븐 소더버그가 자신의 극장용 장편 은퇴작이라고는 했다는데, 요걸로 그만두기는 좀 아쉽지 않을까 싶어요. 초반의 나른함과 대조되는 후반부의 주인공이 추락하는 에너지가 좋습니다.
일대종사
90년대 학번들은 왕가위의 신작에 대해서 기대하는 어떤 것들이 있죠. 바로 그런 비주얼과 정서로 충만한 영화입니다.
블루 재스민
주인공 캐릭터에게 감정 이입의 여지를 주다가 휙 빼앗아 가곤 하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인 우디 앨런의 강렬한 신작. 올해 아카데미 수상이 유력한 케이트 블랜칫의 연기가 뛰어납니다.
프리즈너스
미스터리는 소설에 어울리는 장르라 영화로 제대로 만들기가 쉽지 않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잘 쌓아 나가서 결국 성과를 만들어 내더라고요. 미국식 미스터리 스릴러 소설에 익숙하다면 새로울 것은 없어요.
러시: 더 라이벌
F1 경주의 긴박감과 스릴을 말 그대로 쥐어짜낸, 촬영-편집-사운드가 인상적입니다. 두 레이서의 라이벌 관계도 상투적이지 않게 잘 풀었고요.
그래비티
이 영화의 3D 효과나 디테일들은 영화를 제대로 만들고 싶은 사람들에겐 기본적인 것들죠. 이 영화의 가장 뛰어난 점은 각본이고 그 다음이 배우의 연기죠.
이미 시작된 2014년에도 재미있는 영화들이 기다리고 있으면 좋겠습니다. 시절도 수상하고 술술 잘 풀리는 일도 없지만 좋은 영화들과 함께 또 1년을 보낼 생각을 하면 또 설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