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無知)는 지(知)보다 빨리 확산하지. 그러니 어둠의 속도는 빛의 속도보다 빠를지 몰라. 빛이 있는 곳에 늘 어둠이 있어야 한다면, 어둠이 빛보다 먼저 나아가야지.
이 책은 미국 소설가 엘리자베스 문의 2003년작입니다. 우리나라엔 정소연의 번역으로 북스피어에서 2007년에 나왔습니다. 원래 엘리자베스 문은 판타지와 SF 활극 시리즈물로 미국에서 인정받는 작가라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 존재가 가진 근원적인 의문을 깊게 파고 든 이 책이 출간되었을 때, 사람들을 많이 놀라게 했다고 하네요. 이 책으로 작가는 2003년에 네뷸러상을 받았습니다.
가까운 미래에 살고 있는 우리의 주인공 루 애런데일은 자폐증이 있는 30대 남성으로, 제약 회사에서 특수 연구직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자폐증에 대한 치료 및 재활 기술이 지금보다는 발전되어서, 루는 직장도 다닐 수 있고 취미 활동도 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일정 수준의 교류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새로 온 부서장이 장애인 복지시설 축소를 통해 경비 절감을 하겠다며 루와 그의 동료들에게 자폐증 치료 뇌수술을 받으라고 강요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자폐증이 있는 주인공 루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과 그의 심리에 대한 상세한 묘사였어요. (물론 이것이 가능했던 건 작가 자신이 자폐증을 앓고 있는 아들을 키우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정상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사고 방식과 행동 양식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죠.
그러나 이 책의 뛰어난 점은 역시 루의 마지막 선택입니다. 어떤 강요도 없이 스스로 자신의 미래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서서, 수술이 잘못될 지도 모르고 지금까지 쌓은 인간관계를 모두 잃어버릴 지도 모를 위험에도 불구하고, 그는 더 나아질 수 있는 가능성을 향해 한 발을 내딛습니다.
저는 이런 게 인간의 숙명 혹은 종특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봤어요. 시궁창 같은 현실이 무슨 짓을 해도 바뀌거나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아주 조그만 가능성 한 조각만 있다면 자기의 전부를 내던져 보는 거 말이죠. 그런 게 아니었다면 인류 문명의 진보는 아예 불가능했을 거예요. 미래가 두려울 때 가장 필요한 것은 어쩌면 그냥 한 걸음 성큼 내딛어 보는 것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