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개봉작들을 살펴 보면 유난히 좋은 영화들이 많았습니다. 규모는 작지만 보석같은 외화들이 여러가지 이유로 묶여 있다가 한꺼번에 풀린 덕이라고 봐야겠죠, 아무래도. 이 리스트에도 그런 영화들이 몇 편 들어가 있습니다.
반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는 대참사에 가까운 해였습니다. 상영 시간 내내 흥미롭게 볼 수 있었던 영화가 거의 없었으니까요. 돈만 때려붓는 거 말고도 할리우드가 잘할 수 있는 건 충분히 많은데 말이죠. 2013년을 기대해 봅니다.
한국 영화도 상황은 비슷합니다. 천만 영화가 두 편이나 나왔고 여러 작품이 돌아가며 일년 내내 수준급 흥행을 거두긴 했습니다만, 여전히 진짜 괜찮은 작품을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김기덕의 <피에타>가 한국 영화 최초로 황금사자상을 탔고, 홍상수의 <다른 나라에서>도 비평가들의 좋은 평가를 받긴 했지만요. 글쎄요, 제가 보기엔 두 작품 다 오래 기억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다음은 2012년 극장 개봉작들 중에서 제 마음 속에 남아있는 영화들을 뽑아 본 것입니다. 모두 16편이고, 극장 개봉일 순으로 정리했습니다.
자전거 탄 소년
전작인 <로나의 침묵>에서 다소 주춤했던 다르덴 형제가 훨씬 좋은 영화를 들고 돌아왔습니다. 다큐멘터리 스타일을 유지하면서도 그 안에 풍부한 정서를 담아내는 이들의 특기가 이번에도 잘 드러납니다. 더 나은 삶을 향한 열망과 인간의 선의가 만나 빚어진 감동적인 작품. 2011년 칸 심사위원대상.
신과 인간
종교적 신념과 현실 세계의 상황이 서로 충돌할 때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종교를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시험에 들게 되는 질문이죠. 이 영화는 바로 그 질문에 관한 것입니다. 알제리에 위치한 수도원에서 있었던 실화를 극화했습니다. 종교적 수행과 소명에 대한 헌신이 보여주는 숭고한 아름다움이, 알제리의 풍광과 어우러져 깊은 종교적 체험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2.35:1 촬영의 교본이 될만한 영화이기도 하고요. 2010년 칸 심사위원대상.
휴고
할리우드 영화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준 작품입니다. 정교한 미장센과 유려한 촬영이 마음을 사로잡죠. 2012년 아카데미 기술부문 5관왕은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작품상 받은 <아티스트>보다 훨씬 오래 기억될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아티스트>는 영화라는 매체를 이야기를 구축하는 도구로 사용하는데 그치지만, <휴고>는 영화에 대한 사랑 고백 그 자체를 펼쳐 보였기 때문이죠.
화차
2012년의 한국 영화는 미화된 기억 아니면 사회의 고정 관념에 기댄, 이야기를 위한 이야기가 유난히 많았습니다. 아무래도 보수화된 사회의 분위기가 일정 정도 반영된 것이겠죠. 이럴 때일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문제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처참한 사회 현실이 만들어낸 인간성의 어두운 심연을 침착하게 들여다 보고 함께 아파하는 이 영화는 분명히 올해의 중요한 성과입니다.
디어 한나
외국의 수작을 한국에 들여 오면서 제목을 바꾸곤 하는데, 이 영화의 경우는 특히 어설픈 작명 실력으로 관객들과 만날 기회를 날린 대표적인 케이스입니다. 어차피 타겟 관객층은 예술 영화팬인데 전혀 그들에게 어필하지 않는 제목이었죠. 영국 중하층 계급의 녹록지 않은 현실을 다룬 영화 내용과도 안 맞고요. 그냥 부산영화제에서처럼 원제 <Tyrannosaur>를 그냥 발음나는 대로 썼으면 어떨까 싶어요. 각본과 샷 구성, 배우들의 연기가 좋았던 이 작품이 그냥 묻히는 게 아쉬워서 그럽니다. 2011년 선댄스 감독상.
온 투어
사실 이 영화는 좀 경계에 있는 영화예요. 전체적으로 느슨한 구성에 만듦새도 그렇게 좋지 않은데 말이죠. 그러나 이곳저곳 떠돌아 다니며 환상적인 스트립쇼 무대를 만드는 배우들. 그리고 개무시 당하면서 어떻게든 공연을 계속하려 하는 주인공. 그들의 모습이 자꾸 눈에 밟히거든요. 인간이 하는 짓 중에 가장 놀라운 것이 타인에게 연대감을 표시하는 거라는데 동의하신다면 적극 추천합니다. 2010년 칸 감독상.
킹메이커
근래 본 최고의 정치 스릴러 영화입니다. 사실 이런 식의 딜레마는 요즘 유행이기도 합니다. 특히 미드에서 많이들 다루고 있죠. 원래 희곡인 원작을 감독인 조지 클루니가 영화로 잘 뽑아냈습니다. 전 이 영화를 보고 라이언 고슬링을 인정하게 됐어요. 폴 지아매티,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 같은 최고의 배우들과 연기한 인상적인 씬들 때문이죠.
블루 발렌타인
완전히 부서진 결혼.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을까요. 이 영화는 그걸 되짚어 봅니다. 문제와 원인을 정확하게 보여주면서도, 쉽게 결론을 내지 않는 것이 이 영화의 가장 훌륭한 미덕입니다. 누가 문제를 몰라서 그러겠습니까. 사람의 마음이란 게 그렇게 움직이지 않는 걸요. 미셸 윌리엄스와 라이언 고슬링이 첫 만남의 설렘부터 파국의 아픔까지를 섬세하게 연기합니다.
후궁: 제왕의 첩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욕망을 끝까지 파헤쳐서 파국으로 밀고 나가는 힘이 좋았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좋은 대학 가라고 닥달하는 부모들과, 그들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반항하는 자식들의 모습이 자꾸 생각나더군요. 배우의 감정 표현을 틀에 가두지 않고, 그들의 내
에서 꿈틀거리는 에너지를 잘 포착해낸 감독의 연출력에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두 개의 문
올해 한국영화 중에서 한 작품만 꼽으라면 저는 이 작품을 꼽겠습니다. 제한된 소스와 열악한 상황을 감안할 때 나올 수 있는 가장 최선의 결과였습니다. 오히려 자료가 더 많았더라면 영화가 이런 식으로 나오지 않았을 수도 있어요. 정권 교체 실패로 진실 규명을 위한 싸움을 계속해야만 하는 용산 참사 유가족들. 잊지 않겠습니다.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애초부터 앤드류 가필드와 엠마 스톤 말고는 이 작품에서 기대한 게 별로 없었습니다. 하지만 화려한 볼거리보다 캐릭터의 깊이를 더하는데 공을 많이 들인 이번 리부트는 의외로 성공적이었죠. 올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이 특별한 볼거리도 감동도 주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더 돋보이기도 했고요.
미드나잇 인 파리
이 단순하고 환상적인 영화는 모든 예술가들의 운명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자기가 선택한 매체의 과거를 끊임없이 탐닉하면서도 동시대의 호흡을 놓쳐서는 안되는, 그 끝이 안 보이는 여정 말입니다. 전세계 흥행 1억불을 넘기며 우디 앨런의 영화 중 제일 돈을 많이 번 영화가 되었습니다.
대학살의 신
애들 싸움에 끼어든 양쪽 부모들의 교묘한 자존심 싸움과 책임 전가하기에 관한 영화입니다. 미국의 중산층이란 사람들이 얼마나 허약한 정신적 기반 위에 서 있는지 아주 잘 보여주죠. 그나마 미국이니까 분량이 나오지 우리나라 중산층이 주인공이었으면 그냥 단편 영화 만들 분량이나 나왔을까 싶네요. 연극 원작이고, 배우들의 앙상블이 눈부신 영화입니다.
루퍼
영화 장르로서의 SF는 간단하면서도 유니크한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만드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광대한 세계관을 다루는 영화도 간혹 성공을 거두긴 하지만, 그런 것은 소설을 읽는 게 더 낫죠. 표현하기도 더 쉽고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이 영화를 올해의 SF로 꼽아 봅니다. 주름 자글자글한 브루스 윌리스 옹은 여전히 액션 씬에 더 어울리고, 조셉 고든 레빗은 분장으로 약간 망가지긴 했어도 예의 매력적인 표정을 보여줍니다.
아무르
전작인 <하얀 리본>과 마찬가지로, 한 가지로 해석되기 어려운 모호한 상황을 다룹니다. 직설적이었던 예전의 미카엘 하네케 작품과는 다르게요. 그렇지만 메시지는 똑같아요. 이 영화는 행복하게 살았던 노부부의 마지막에 관한 슬픈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이 힘을 잃는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주인공 부부가 그토록 지키려고 하는 도덕, 체면, 사랑 같은 부르주아의 가치, 그리고 어떻게든 유지하려고 했던 부르주아의 생활 방식 같은 거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거지요. 영화의 맨 마지막 씬을 보고 있으면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는 성경의 전도서 구절이 저절로 떠오릅니다. 2012년 칸 황금종려상.
주먹왕 랄프
연말에 만난 즐거운 깜짝 선물. 놓칠 뻔 했지만 얘기들 많이 해주셔서 챙겨 볼 수 있었습니다. 픽사 애니라고 해도 믿을 만한 과감한 설정과 스피디한 전개, 공을 많이 들인 캐릭터 설정이 돋보입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완벽한 진화를 보여주는 훌륭한 작품이죠.